1940년 6월, 지옥불 모퉁이 7월 10일 바다사자 작전 이전에도 양국은 이미 도버해협에서 전초전을 진행했다. 양국 모두 이 시기에는 전력을 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진 못했다. 하지만 독일 군 입장에서는 도버 해엽에서의 제공권 장악이 필요했고, 영국 역시 제공권 수호가 필요했다. 게다가 영국은 아직 이렇다할 공중 전투를 경험해보지 못해 본격적으로 본토에서의 항공전 이전에 경험을 쌓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양국은 1940년 6월에 약 서너차례의 교전을 펼쳤다. 물론 전면전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양측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 양국의 조종사들은 이번 교전으로 양측의 전투기가 실제로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특히나 독일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bf109가 세계 최고의 전투기라고 자부..
이슬람과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장군이자 통치자 VS 1세기만에 멸망한 속빈 강정 셀주크 제국을 만든 주범이자 전쟁광 현 시점의 많은 중동 국가들은 오일 머니에 힘을 입어 다시 성장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구의 헤게모니를 쥔 국가는 미국과 유럽일 것이다. 하지만, 중세 유럽으로 돌아가자면 지금의 강대국 역할을 하는 국가는 북미나 유럽이 아닌 바로 중동 지역이었다. 특히나 중세는 중동 지역의 힘이 대단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럽에게 공포의 대상을 한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셀주크 제국이다. 셀주크 제국의 팽창은 유럽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이들과 국경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더욱 그랬다. 이는 동로마와 셀주크 국가간의 대결로 그친 것이 아니라 카톨릭과 이슬람의 종교적 색채..
연합국의 절망적인 상황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드 골 소장과 구데리안의 항명 등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전쟁에서 이정도로 상대를 압도하기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1940년 여름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는 비단 독일 내에서의 인기로 그치지 않았다.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독일과 동맹 조약을 맺으며 추축국으로 들어간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반 강제적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된다. 무솔리니 역시 히틀러에 감명 받아 자신의 야욕을 펼치기 위해 곧바로 아프리카와 그리스로 침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자. 반대로 연합국은 절망적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포병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영국과 동..
(1편 : https://adrian0220.tistory.com/177) 해방 이후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이었지만 실상을 전혀 달랐다. 건준위의 노력으로 치안은 어느정도 유지되었지만 여전히 국가 방향을 놓고 많은 사상가와 정치인들이 충돌했다. 그러자 미군정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미군정을 상대로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건준위을 중심으로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당연히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좌익 정치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을 좌우 합작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미국, 우파 정치인과 협상을 위해 서울을 비운 사이 박헌영이 여운형을 내쫓고 인민공화국 인사들을 전부 좌익 정치인으로 바꿔버린다...
적색 상황 발발 덩케르크를 독일군에게 함락하며 프랑스는 마지막 남은 북부 지대를 모두 헌납하게 된다. 영국 해협 연안의 모든 도시를 차지하며 근방의 제공권 마저 빼앗기게 되며 영-불은 서로 작전을 공유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전락한다. 연합군은 황색 상황이 지속 될 동안 총 140여개 사단 중 61개의 사단이 무너지며 절반에 가까운 병력 손실을 입게된다. 프랑스의 패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원수 베이강은 파리 근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비를 마친 B집단군이 이제 파리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금새 무너질것이라고 예상한 베이강의 방어 전술이 의외의 효과를 보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지켜야할 전선의 크기를 줄이면 방어하는 입장에선 더욱 효율적이다. 게다가 프랑스..
국가의 독립과 통일 대한민국을 꿈꿨던 좌우 통합 지도자 VS 자신의 사상적 기반 없이 좌우 합작만을 바란 실속 없는 기회주의자 나는 사람마다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인물을 좋아한다. 그사람이 지난 가치관에 따라 과오가 갈리고 혹평과 호평이 모두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특히나 좋아한다. 그 이유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현대에 오면 입체적인 인물 들은 더욱 많아진다. 이번에 소개드릴 여운형 역시 사람마다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혼란의 연속이었던 대한민국 해방정국에서 가장 빛이 났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대통령을 맡을만한 그릇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그가 대통령에 올랐다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대체 여운형은 누구..
홍콩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다. 처음 시위가 일어났던 것이 6월 경이었던것으로 기억하는데 금방 끝이 날줄 알았던 시위가 반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다. 홍콩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간략하게 알아보자. 시위의 계기가 된 것은 홍콩 정부에서 국회에 제출한 홍콩 범죄인 인도 법안이 문제였다. 말그대로 타국의 범죄인이 홍콩으로 도주 했을 경우 해당 범죄자를 타국에서 소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법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이 사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홍콩에 있는 반중인사에게 중국이 범죄인 딱지를 씌우면 해당 법안에 의해 반중 인사는 곧바로 중국으로 송환되게 되어 있다. 홍콩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법안이다. 중국은 예전부터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홍콩과 대만을 하나의 중국에 포함시키려고 노..
구데리안의 도박 독일의 보수적인 군사 지휘관들은 여전히 구데리안의 빠른 전차전에 대해 우려했다. 이는 우려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데리안을 해임하는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그의 상급 지휘관이었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노력으로 다시 군단장으로 복직할 수 있었지만 어쩃든 여전히 독일의 군사 지휘관은 구데리안을 저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프랑스 침공 성공의 7부능선을 넘은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내부 문제로 골머리를 썩혀가고 있었다. 바로 구데리안이 해임된 5월 17일과 18일 이틀간 독일군은 침공을 중단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빠른돌파를 걱정해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에게 침공을 잠시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히틀러는 세계 1차대전에서 독일군이 너무 빠르게 전진하다 마른에서 후위를 노출당해 패배한 기억이 ..
10월 혁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레닌은 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외무장관에는 레프 트로츠키가 올랐고, 민족인민위원직은 스탈린이 맡게 되었다. 세계에 유래가 없었던 노동자국가의 탄생이었다. 혁명은 비교적 조용히 이뤄졌고, 많은 사상사가 발생되지 않은 평화적 혁명이었다. 그렇게 훗날 세계 초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는 노동자들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 했다. 더이상 지속이 의미가 없던 독일과의 전쟁을 끝냈다. 혁명 기간동안 멈췄던 많은 기간 산업을 재작동시키며 국가가 다시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은행의 금리를 동결시키고 주요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레닌은 자신들의 친 노동자 정책..
아르덴 공세의 시작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드디어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프랑스에 혼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B집단군을 전날부터 운용하며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를 공략했다. B집단군에는 다수의 공수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활용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적극적으로 군대를 파견해 방어 지점에 대한 혼란을 야기했다. A집단군도 벨기에로 출발했는데, 문제는 대규모 병력이 좁은 길목을 지나가면서 발생하는 엄청난 교통체증이었다. 구데리안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독일 군은 기갑 부대를 동원했지만, 넓은 부피를 차지하는 전차의 특성상 빠른 벨기에 진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기갑 병력을 좋게 보지 않고 있던 룬트슈테트는 기갑 병력에 대한 개선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