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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국공 합장과 전쟁 준비
중국은 당시 장제스를 중심으로 국공내전이 한창이었는데,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중국 공격은 중화민국과 공산당 국가에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중화민국의 주석 린썬과 공산당 지도부 주더, 저우언라이가 모여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루는데 성공 한다. 중국의 위기의식을 정반대의 두 세력이 서로 손을 맞잡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결국 장제스를 새로운 주석으로 하는 국방최고회의가 열리게 된다.
화북에 국한 되어 있던 일본군의 도발은 상해를 기점으로 화중지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상해를 침공하기전 홍차오 공항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군 중위 였던 오오야마 이사오가 홍차오 공항 인근의 군사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사이토 요조 일병과 같이 차를 운전해 홍차오 공항으로 난입한 사건이다. 중국군 보안대는 이를 보고 당연히 제지 했지만, 오오야마 중위는 이를 무시하고 중국군 병사에게 총을 쏴 살해하게 된다. 그러자 중국군 보안대는 바로 해당 차량을 폭격했고, 오오야마 중위와 사이토 일병을 목숨을 잃게 된다.
일본군을 이를 빌미로 중국군에게 보안대 철수를 요구했고, 이미 전쟁을 각오한 중국은 상해에 군사를 증강하며 일본의 요구를 무시한다. 1937년 8월 13일, 일본 육군 해전대가 상해에 도발을 가하는 것을 시점으로 상해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해갔다. 당시 중국군과 독일군은 동맹 상태였는데, 당시 중국에 다편된 독일군 사령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의 지휘아래 중국군은 일본과 싸우게 된다.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화중 전역
장제스는 일찍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해왔다. 만주 사변을 기점으로 중화민국 내 반일 감정은 더욱 거세졌고, 만주국을 차지한 일본이 중국 중심지 (정확히는 베이징 이남~양쯔강 이북 지역) 까지 손을 뻗을 것이 분명했다. 장제스는 독일과의 동맹 관계를 활용해 독일식 현대 보병 및 전차 군대를 양성해 일본군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꽤 빛을 보았다.
당시 일본은 중국 함락을 위해서 단지 5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자신만만 했는데, 상하이 점령에만 무려 3개월을 쏟게 만들었다. 심지어 일본군은 5만명이라는 어머어마한 사상자를 기록하며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양쯔강 특유의 전염병까지 돌게 된다. 일본군은 상해 부근에 항공모함 3대 카가, 류조, 쇼호를 배치해 지속적으로 중국 양쯔강 하류 지역을 폭격했다. 결국 중화민국의 해군은 공중에서의 폭격을 피하지 못하고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며 장인 지역까지 내주게 된다.
중일전쟁을 수행중인 군인
위기의 중화민국
장제스는 더이상 자국만의 힘으로 전쟁을 이기기엔 어렵다고 판단해 동맹관계인 독일을 비롯해 미국에게도 도움을 요청한다. 일본 측도 오랜 전쟁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을 통해 일본의 강화 조약안을 제시한다. 장제스가 읽은 강화 조약에는 화북 지역 대부분을 일본에 넘기는 무리한 처사가 있다고 반대했고, 당시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컷던 중국이었기에 강화 조약을 무시한다. 일왕 히로히토는 앞으로 일본의 요구는 더욱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이제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 도착했다. 양쯔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던 난징은 삼국지의 등장 인물 손권이 도읍을 옮긴 이후 중국 7대 성도로 성장한 대도시였다. 장제스는 앞으로 다가올 태평양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난징을 수도로 삼게 되었는데, 이런 중화민국 최대 도시에 일본군이 코앞에 들이 닥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징을 사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우한과 충칭으로 퇴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난징의 경우 평야 지대가 넓어 전략적 이점이 전혀 없었다. 상해를 빼앗긴 시점에서 난징까지의 진격은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수도 난징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더불어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탕성즈가 나서며 난징을 지켜내겠다고 말하자 장제스는 그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난징의 사수를 부탁하고, 12월까지 그와 같이 난징 방어를 위해 힘쓴다.
탕성즈
난징 전투
1937년 12월 4일 일본군이 난징에 도착하며 난징 방어전이 시작된다. 사실 일본군 입장에서도 난징은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난징의 경우 수비하기도 매우 어렵기에 오히려 빠르게 화중 지역에 도착해 장제스를 사로잡아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을 더욱 분열 시키는 것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전쟁에 눈이 먼 일본의 언론들은 중국의 수도에 일장기와 욱일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보도를 연일 내보내며 난징 공략을 시작했다.
장제스와 팔켄하우젠 사령관은 12월 6일 난징을 탈출 했고, 탕성즈만이 남아 난징을 수비하게 된다. 일본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대장은 난징 함락이 코앞이라고 생각해 일본 군대에 특별 지시를 내린다. 마쓰이 대장은 외국 수도에 입성하는 대사건답게 난징 성내에서 일제의 약탈행위를 금하는 특별 지시를 군대에 내보낸다.
장제스의 탈출시간을 벌어여했던 탕성즈는 난징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결사 항전을 이어갔다. 12월 7일 일본군이 탕성즈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탕상즈는 무시하고 성문을 걸어잠궜다. 12월 10일 일본에 난징을 함락했다는 오보가 나며, 일본 국민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는데, 12월 11일까지도 난징성은 탕성즈의 결사 항전으로 교착상태였다. 본국에서는 중국을 함락시켰다는 환호성에 애드벌룬을 띄우고 축하 행사가 한창인 와중에 일본군은 성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포탄과 총을 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12월 12일,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장제스도 탕성즈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지만, 탕성즈는 자신만 바로 퇴각하면 혼란에 빠질것이라고 생각해 미리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서를 제출하고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은 방법을 짜낸다. 12일 정오 중화문과 중산문을 파괴하여 난징에 빠르게 일본군이 진격해왔고, 13일 새벽 탕성즈는 군사 기밀을 없애고 일반인으로 위장하며 도주를 시도한다.
난징에서 학상당한 중국인 시체를 처리하는 병사
난징 대학살 사건
난징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탕성즈는 일본군이 들이닥친지 1주일도 안되서 성을 내주게 된다. 물론, 당시 일본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기에 1주일이면 제법 군사를 잘 막았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이후 일어난 참상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아픈 결과다.
난징 함락을 지시한 마쓰이 이와네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일본군에게 성내에서 약탈을 금지하고 명예롭게 점령할 것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마쓰이는 곧바로 전장을 떠나게 되는데, 그의 명령의 지켜지기는 커녕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이미 전쟁의 승리에 눈이 뒤집힌 일본군은 난징에서 젊은 청년들은 마구잡이로 죽이고, 여성은 강간하기에 이른다. 중국 국민당원들은 다기는데로 죽이며 난징에 있던 20만명의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쏴죽인다. 나중에서는 총알도 부족해 칼로 난도질하고 장작불에 태우며 난징 시민들을 학살한다. 일본군은 시체들 연료 태우거나 땅속에 묻었는데, 땔감이나 연료가 떨어지면 그냥 양쯔강에 시체를 던져버리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난징 대학살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살아있는 난징 시민들의 얼굴에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쏴 불을 붙이고, 임산부의 배를 칼로 짤라 태아를 꺼내기도 했으며, 어린 소녀에게 염산을 뿌리고 100여명의 사람들의 코와 귀를 자르기도 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집행한 전후 재판에서 일본 군이 난징 대학살 당시 강간했다고 밝혀진 사람은 총 2000명인데, 이를 실제로 집계하면 무려 80000만명의 여성이 난징 학살에 강간당했다고 추정된다.
난징의 지옥은 6주간 지속되었고 1938년 봄에 드디어 대학살이 끝나게 된다. 중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이 사건은 일본이 얼마나 참혹하게 주변국들을 학살하고 사람들을 죽였는지 보여준다. 난징 대학살은 단일 사건 중 세계 최대 규모의 강간자수를 보여주며 동시대 발생한 위안부 사건과 더불어 그들이 얼마나 저열하고 추악한 민족인지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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