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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



나치 독일의 시작


  장검의 밤으로 독일에서 대숙청이 일어났다. 히틀러의 정권을 위협할 수 있었던 에른스트 룀,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모두 죽었고, 곧이어 고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역시 죽게 되며 히틀러의 권력을 위협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독일 전 국민이 그를 향해 나치식 경례를 하게 되었다. 


  전대미문의 숙청에 놀란 건 독일 국내만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에서 히틀러에 이런 행보에 놀랐다. 대부분의 많은 나라들은 히틀러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수많은 사람은 죽인 것을 비난했다. 히틀러를 비난한 국가는 영국, 프랑스 등 세계 1차대전 승리로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득을 본 국가들이었다. 양국은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특히 양국은 한번의 큰 전쟁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죽어나간걸 목격한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기에,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참혹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한창 1차대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이제 겨우 40살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한번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시민들에게 말하는 순간 그 지도자는 바로 탄핵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1934년 7월 2일 / 장검의 밤 관련 동아일보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반면 히틀러의 대숙청에 감동받은 나라도 있다. 독일과 가장 밀접한 역사를 공유하는 오스트리아와 저 멀리 히틀러 처럼 대숙청으로 권력을 잡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였다. 이 두나라는 히틀러의 행보를 예의주시 하고 있었는데 장검의 밤을 통해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위치



과거 신성로마제국 영토 (호엔슈타우펜조 시기)



오스트리아 나치당 활동을 시작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민족의 뿌리였고, 언어도 비슷하다. 과거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면서 그들 중 뿌리 하나가 지금의 독일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이고, 이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신격이었다. 그리고 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와 합스부르크 왕조가 손을 잡고 만든 나라가 바로 오스트리아이다. 이렇게 두 나라는 이전부터 역사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양국의 합병 시도는 신성로마제국 해체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서로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양국간의 통합을 진행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이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도 이어졌다. 이 당시엔 프로이센 제국의 총리 비스마르크의 활약으로 독일 제국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다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분리되었으며, 세계 1차대전 이후 삼국간의 체제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등장은 새로운 독일 제국의 탄생의 서막이었다. 오스트리아 역시 세계1차대전 패배이후 많은 영토를 잃고 경제가 어려워졌다. 오스트리아는 기독교 사회당과 사회민주당 양당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 사회당은 독일과의 통합을 원했지만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기사당은 사민당 세력을 치기위해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손을 잡게 된다. 앞에서 본 바이마르 공화국과 매우 유사한 행보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오스트리아 총리 돌푸스의 사망


  파시즘 정당이었던 오스트리아 기사당은 경제 대공황에 힘입어 세력을 키워갔다. 경제공황으로 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사회 체제가 무너져가자 많은 사람들은 강력한 체제를 원했다. 특히 이런 바람은 막대한 전후 배상금을 물게된 세계1차대전 패전국 쪽에 더 크게 불었다. 오스트리아 역시 기사당이 정권을 잡게 되고 1932년 기사당 출신의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총리에 오르게 된다.


  돌푸스는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파시즘 정책을 이어갔다. 이전까지 기사당은 나치당에 매우 우호적이었는데, 돌푸스가 본격적으로 파시즘 정책을 펼치자 나치당은 토사구팽이 될 위치였다. 파시즘은 전체주의를 의미한다. 돌푸스는 파시즘 정신에 따라 기사당 이외에는 모두 해산시킬것을 명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은 1934년 7월 25일 돌푸스를 암살하게 된다. 돌푸스의 갑작스러운 죽고 새로 쿠르트 슈슈니크가 총리에 오르게 된다. 돌푸스가 세운 조국전선이라는 새로운 정당 소속이던 슈슈니크는 돌푸스의 정신을 받아 계속 오스트리아에 파시즘을 심어나간다. 슈슈니크의 재임 기간은 나치당과의 계속된 충돌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이탈리아 군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이탈리아에게 에티오피아는 매우 아픈 기억이었다. 1896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을 목표로 에티오피아에 야심차게 들어갔지만, 대패하고 돌아선 기억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은 이탈리아가 아직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열강 제1국 반열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증명했을 뿐 더러 전세계 다른 나라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과거 로마제국의 부흥을 목표로 북아프리카를 잠식해가던 이탈리아에겐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탈리아는 19세기말 패배 직후 부터 에티오피아에 복수의 칼을 갈아왔다. 비록 중간에 1차대전으로 인해 시기가 한참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다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에리트리아와 소말릴란드에 군대를 배치했고, 아프리카의 절대적 패자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에티오피아를 고립시켰다. 거기에 히틀러의 성장은 무솔리니에게 큰 자극제로 작용했다.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전쟁 초기에는 에티오피아의 수많은 병력으로 이탈리아가 고전했으나, 이탈리아의 대대적인 독가스 공세가 성공적으로 작용했고 에티오피아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1차 에티오피아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도움이라도 있었으나 이번엔 전혀 없었다. 결국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에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 소말릴란드를 잇는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했다.


  재밌는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번엔 에티오피아 협력하지 않은 이유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묵인하는 대신 그들이 대독 전선에 빨리 와주기를 바래서 였다. 히틀러의 성장이 그만큼 영국과 프랑스에겐 성가셨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점령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뒷통수를 거하게 치고 히틀러와 손을 잡는다. 영국-프랑스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세운 새로운 파시즘이라는 질서에 대항할 준비가 필요해졌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군인들



파시즘, 전쟁의 공포를 몰고오다.


  파시즘이란 일종의 전체주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모두 자신의 정당 이외에는 모두 부정했다. 파시즘은 자유주의를 철저히 부정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회체제하에선 이런 극단주의가 뿌리를 박을리 없지만, 관대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베르사유 체제와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전세계에 파시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우파로 분류되기는 하나 우파적 성향도 좌파적 성향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특수한 사상이다. 극과 극이 서로 만난다는 표현을 떠올린다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파시즘 체제에서는 자본가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자유주의 체제처럼 경제 활동이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의 자유도는 국가에 대한 기여도에 비례하고, 개인의 자유보다 무조건적으로 국가의 이익이 우선시되게 된다. 또한 파시즘 정당 이외에 모든 정당이 부정되는 자본주의 제도이다. 이렇게 파시즘이 좌우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처럼 뿌리깊은 사상적 기반에 의해 탄생된 사상이 아닌 현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성급하게 탄생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지도층들이 현 체제는 유지하고 싶으면서 혼란스러운 사회를 극복하고자 급조한 사상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파시즘 정부는 자신들의 민족과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1930년대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스포츠에까지 손을 뻗는 저급한 짓을 저지른다. 대표적으로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이 두 대회를 자신들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했다. 이 두 대회의 여파로 아직도 IOC와 FIFA가 스포츠에 정치색을 배제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1980년대 다시한번 냉전체제의 선전 도구로 올림픽이 활용되는 슬픈 역사가 반복되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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