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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서부 팽창정책


  1930년대 스탈린 정권 하의 소련은 대단한 성장을 이룩한다. 러시아 제국때는 미뤄두었던 공업화에 성공해 사회 기반은 점차 탄탄해져갔고, 군수 물자도 대거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이전부터 러시아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는데, 바로 흑해와 발트해의 부동항 확보였다. 러시아는 겨울이 되면 대부분의 항구가 얼어 겨울엔 교역이 불가능 했다. 그렇기에 스탈린은 발트3국의 부동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확보를 통해 대서양으로 향하는 항구를 확보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히틀러라는 동반자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폴란드 점령을 완료하며 동유럽에서의 패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이제 소련은 대서양 진출을 위한 북유럽 점령을 시도하게 된다. 스탈린이 넘어야할 산은 발트 3국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스칸디나비아 3국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였다.



발트 3국 위치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발트 3국 역시 스탈린이 다음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폴란드 점령을 마친 1939년 에스토니아에 군사기지 건설과 상호 원조 조약을 허용하라는 불공정 협정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하게 된다. 소련군을 막을 방법이 없던 세나라는 9월 28일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10월 5일에는 라트비아, 10월 10일에는 리투아니아가 이 조약에 서명을 하고 총 75,000여명의 소련군이 발트 3국에 주둔하게 된다. 다만 여기서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르면 리투아니아는 나치 독일이 차지하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소련이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만 이때에는 스탈린이 3국을 완전 합병한 것은 아니어서 히틀러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역시나 서구 국가들은 소련에 팽창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엇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점령해도 손 놓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인데 결코 소련의 발트 3국에 문제를 삼을리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서구 진영은 히틀러를 막기위해서 스탈린의 힘이 필요했다. 만약 스탈린의 팽창을 문제 삼는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맹 체계를 더욱 단단히 할 뿐이라고 판단했기에 스탈린의 팽창을 그리 문제삼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 스탈린은 손쉽게 발트 3국을 점령한다.


  실제로 스탈린이 3국을 합병한 시기는 1940년 중순이었다. 그 사이 스탈린은 핀란드와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바로 다음에 하고 우선 발트 3국의 얘기를 먼저 끝내도록 하겠다. 이미 소련군이 3국에 주둔되어 있는 상황에서 스탈린은 한번더 세 나라에게 소비에트 연방으로 넘어오라는 최후 통첩을 보낸다. 이전의 조약이 불평등한 상호 방호 및 원조 조약이었다면, 이번은 아예 소비에트 연방으로 합병하는 것이었다. 발트 3국은 이를 당연히 거부했다. 소련은 1940년 6월 15일 발트 3국으로 군대를 보냈고 불과 1주일만에 세 나라를 점령한다. 결국 세나라 모두 굴욕적으로 소비에트 연방하에 놓이게 된다. 리투아니아는 8월 3일, 라트비아는 8월 5일, 에스토니아는 8월 9일 각각 소련 연방에 들어오게된다.


  문제는 독소 불가침 조약에서는 리투아니아는 나치 독일의 영토가 되어야 했는데 소비에트연방으로 소속된 것이었다. 이는 세계 2차대전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소련의 핀란드 침공


  다시 1939년 스탈린이 발트 3국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발트3국까지 자신의 세력권으로 놓자 스틸린은 이제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눈을 돌린다. 스탈린의 최종 목표는 스웨덴이었다. 이유는 딱 하나 대서양 진출이었다. 이를 위해서 핀란드, 덴마크를 차례대로 무너뜨려야 한다. 스탈린은 핀란드를 침략하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이전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성사시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를 위해 핀란드에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시작한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의 안전 확보를 목적으로 핀란드와 소련 국병 부근의 지방을 할양해 달라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그 땅이 공업 지대가 많은 카렐리아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올란드 제도 및 발트해 연안의 섬들이었다.


  핀란드 입장에서 이를 당연히 들어줄리 없었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 타국의 영토를 할양해 달라는 말도안되는 개소리였다. 핀란드 대통령인 퀴외스티 칼리오는 당연히 소련에 말도 안된다고 통보를 했고, 몰로토프는 이제 자신이 아닌 붉은 군대와 이야기 하라는 협박을 한다. 소련은 결국 사건 하나를 만드는데, 핀란드 국경에 마이닐라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소련군은 이 곳에 포탄 7발을 발사 했다. 자국 군인이 자국 영토안에 있는 자국 마을에 대포를 발사한 것이다. 몰로토프는 마이닐라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지시를 받고 핀란드 대사에게 항의 각서를 보내며 해당 국경에서 30Km 이상 후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번에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 요구를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다만, 소련군 역시 같은 지점으로 후퇴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게다가 양국에서 직접 조사관을 파견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핀란드가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접근할 것이라고 또 한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핀란드의 제안을 거부한다. 자신들은 타국에 철수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국경지대에서 철수할 수 없다는 되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며 핀란드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몰로토프는 자체적으로 이 사건이 핀란드군이 소련 영토로 포탄을 발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1939년 11월 29일 핀란드와의 단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하며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이것이 겨울전쟁이 시발점이 된 마이닐라 발포 사건이다.



만네르하임 선



핀란드의 방어 전략


  북유럽이 대부분 그러하듯 매우 춥고 산지가 많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국의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인 한겨울에 시작되었다. 전체 인구가 370만밖에 되지 않는 핀란드 입장에서는 국력과 병력 모두 엄청난 우위를 가진 붉은 군대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절망적이었다. 붉은 군대는 총 5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핀란드를 침공했다. 반면 핀란드는 현역병, 예비역, 퇴역군인 모두 보아도 간신히 20만명 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전차를 비롯한 군수 물자 부분은 더욱 처참했다. 핀란드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무기가 없어 대부분 국외에서 수입을 하는 실정이었다. 기동이 가능한 전차는 겨우 33대였고, 연료 비축양 역시 짧으면 보름, 길어봐야 두달 안에 연료가 바닥나게 되어있었다. 반면 소련군의 기동 가능한 전차는 무려 3300여대였다. 그리고 핀란드의 대부분의 장비는 1차대전 당시에 사용한 전차였으므로, 질에서나 양에서나 소련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악했다. 결국 핀란드 역시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서구의 지원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핀란드는 국경 안쪽에 위치한 만네르하임선을 사수하는게 제1목표였다. 후고 외스테르만이 방어군 사령관으로 있었다. 핀란드가 1917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이들은 언제 올지 모를 소비에트 연방의 침략을 어느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차츰 소련 군의 진주를 막을 방어선을 구축했다. 특히 핀란드는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척에 존재했다. 그렇기에 핀란드는 만네르하임선 사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만네르하임선이 뚫린 뒤에는 그렇다할 작전이 없던것이 핀란드 군의 가장 큰 문제였다.





겨울전쟁의 시작


  소련군은 11시 30분에 1500대의 탱크를 이끌고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 소련군은 7개 사단으로 하여금 빠르게 만네르하임선을 돌파하여 핀란드 제2의 도시 비푸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라도가 호수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을 기반으로 헬싱키와의 보급로를 차단해 만네르하임선을 남북에서 협공하여 무너뜨리는 것이 목표였다. 헬싱키를 비롯한 핀란드 중부 지역을 차지하고 무르만스크의 병력과의 협공으로 북극해 지역을 차지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전쟁 개시 직후 항공기를 이용해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에 폭격을 가했다. 이후 압도적인 물량을 가진 소련군은 순식간에 만네르하임선에 도달한다. 소련군은 수일내에 전투가 끝날 것이라 판단했다. 만네르하임선까지 도달할 때까지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상대로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었다. 12월 6일 핀란드는 만네르하임선에 눌러앉아 방어전을 고수하게 된다. 


  이때 예비역 대령 출신이었던 파보 탈벨라가 나타난다. 그는 예비역 대령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라도가 호수 북부 지역을 돌파하러 들어올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예비역이었던 탈벨라의 조언에 따라 핀란드 군은 라도가 호수 북부에 대한 대비를 시작하고 그를 다시 현역으로 복귀 시키게 된다. '탈벨라 부대'는 소련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하르바섀르비에 배치된 소련군을 남북으로 협공하면서 동시에 톨바얘르비를 공략해 라도가 호수의 북진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핀란드 군의 작전이었다..


  핀란드군 2개 대대는 핀란드의 측면을 공략하려던 소련군 제718연대와 마주쳤다. 탈벨라 부대는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아아로 파야리의 예비대가 도착하자 탈벨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소련군에 반격을 시작한다. 좁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소련군은 해당 지역 지리에 밝은 탈벨라의 부대에 의해 완전히 궤멸당하고 소련 연대장은 전사했다. 목적을 이룬 핀란드 군은 다시 한번 애글래얘르비 지역을 공략하면서 소련군 75사단을 궤멸시킨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 군은 겨우 100여명이 사상했으나 소련군은 10배가 넘는 인원이 사망하게 되었다. 겨울전쟁 첫번째 교전이었던 톨바얘르비 전투에서 승리한 핀란드 군에게는 엄청난 자신감을 소련군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소련군은 이 전투를 통해 라도가 호 북진 전략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파보 탈벨라



핀란드의 선전


  소련의 추위도 악명높기로 유명했지만, 북극 바로 아래 위치한 핀란드의 추위는 소련보다 더 심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자 소련의 전차는 무의미했다. 추위로 전차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작동되는 전차도 눈덮인 도로 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기동성이 강조되는 전차가 움직이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장점을 상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만네르하임선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특히 오랜기간 핀란드 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파보 탈벨라의 활약은 심히 놀라웠다. 라도가 호수 연한에서 그는 소련군을 상대로 1개 연대만을 이끌고 연전 연승을 거듭했다. 

  

  소련군은 스탈린의 혁명 동지이자 친구 보로실로프가 이끌고 있었다. 보로실로프가 이끄는 붉은 군대는 만네르하임선 앞에서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추위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굳게 잠긴 만네르하임선에서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냈다. 심지어 핀란드 군들은 스키를 타고 내려와 붉은 군대를 유린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소련군 입장에서는 압도적인 물량과 전차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않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를 핀란드에서는 모티 전술이라고 불렀다. 모티는 핀란드어로 통나무를 의미했다. 말그대로 통나무처럼 소련군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게다가 추운 날씨로 소련 병사들은 전투중에 죽는 인원보다 동상으로 얼어죽는 인원이 더 많았다. 눈 덮인 좁은 지형으로 인해 보급 유지의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몇일만에 끝날것 같은 전투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가 1940년이 되어서도 소련군은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소련에 위협앞에서 핀란드 군의 활약을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위기감을 느낀 스웨덴과 덴마크의 원조 또한 큰 몫을 했다. 스웨덴의 경우 핀란드가 무너질 경우 자신들이 다음 타깃이 된다는 것이 불보듯 뻔했기에 핀란드에 절대적인 원조를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핀란드 저격수의 활약이 놀라웠다. 특히 시모 해위해의 저격 실력이 압조덕이었다. 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전쟁에서 무려 100여일 동안 542명읠 사실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소련군에게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었다. 눈 위에서 흰 전투복을 입고 위장한 그에게 소련군은 '붉은 사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핀란드의 스키부대 (출처 : 위키백과)



스탈린, 핀란드에서 굴욕을 당하다.


  핀란드의 선전도 있었지만 소련 내부의 문제도 상당했다. 이전에 스탈린의 대숙청은 오히려 겨울전쟁에서 고전의 주요 원인이된다. 대숙청 당시 군부에 유능한 인재들은 모두 사살하자 군대에는 제대로 된 인물이 그닥 많지 않았다. 그리 유능하진 않았던 친구 보로실로프를 실각시키고 그나마 군 경험이 있던 세몬 티모셴코를 임명하면서 총 지휘를 시작한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실각시키면서 그를 불러 엄청 화를 냈다. 하지만 보로실로프 입장에서도 화가나는건 마찬가지였다. 보로실로프 역시 화가 끝까지나 스탈린한테 대들면서 “네가 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을 다 죽여서 이꼴이 났잖아!”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스탈린이 들은척도 안하고 무시하자 보로실로프틑 화가나 통구이가 든 접시를 들어 테이블로 내동댕이 쳤다고 한다. 스탈린도 어느정도 이 부분을 인정했는지 보로실로프의 하극상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소련의 또 하나 문제점은 구식 전술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공업분야에선 큰 성과를 이뤄 막대한 군수물자를 비축하기는 했지만, 물리적 요인에만 너무 치중을 둔 나머지 전술과 군사 교리 부분에서는 전혀 발전이 없었다. 1910년대 일어났던 세계 1차대전의 교리를 그대로 이어갔다. 이 마저도 과거 러시아 제국의 전술 교범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래서 그나마 붉은 군대에 대해 밝았던 베테랑 마저 스탈린이 모두 숙청했으니 붉은 군대에 대해 제대로 활용할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핀란드의 선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들 핀란드의 선전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서구 입장에서는 스탈린의 힘이 필요했기에 핀란드에 대대적인 원조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는 붉은 군대가 생각만큼 무섭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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