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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



베저위붕 작전


  에리히 레더의 노르웨이 침공 작전이 1940년 1월 10일 완성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해당 계획의 수정을 원했고, 레더는 다시 수정된 작전은 2월경 히틀러에게 전달된다. 이는 독일 북부에 존재하는 강 이름을 따 베저위붕 작전이라고 명명된다. 


  원래 처음부터 독일은 베저위붕 사건을 채택할 생각이 없었다. 나치 독일의 목표는 영국이었다. 하지만, 1940년 2월 16일 발생한 알트마르크호 사건이 독일은 노르웨이로 몰고 갔다. 알트마르크호는 연합군 포로 299명을 싣고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히 영국 영해를 항해할 경우 발각되므로 이들은 노르웨이 영해쪽으로 우회하여 독일로 귀환을 하고 있었고, 영국군은 알트마르크호를 쫓고 있었다.


   노르웨이군은 중립법에 따라 자신의 항구에 들어오는 알트마르크호의 수색을 요청했고, 독일군은 이를 거절했다. 노르웨이 군은 알트마르크호의 입항을 거부했고, 결국 어영부영하는 사이 영국군에게 위치가 발각되게 된다. 영국군을 어뢰와 항공기를 이용해 알트마르크호를 나포하고 포로를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 병사 7명이 사망하게 된다. 


  독일군은 노르웨이에 해당 사건을 강력히 항의했으나, 노르웨이는 중립법에 의해 행동했기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은 노르웨이를 아군으로 돌리지 않는 한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노르웨이를 중립국으로 두는 작전이 실패하자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침공하게 되는 베저위붕 작전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노르웨이 총리, 요한 뉘고르스볼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향하는 독일군 


  영국과 독일은 서로 눈치만 보며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양국의 전쟁에서 승리의 키를 쥐고있는 것은 두 국가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총통 히틀러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노르웨이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칠은 영국 의회에 노르웨이 침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선제 공격을 원치 않는 영국에 여론에 따라 계속 공격 날짜에 대한 지정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결국 영국 해군과 처칠의 윌프레드 작전이 만들어진다.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설치하여 가장 많은 철광석이 수송되는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에서 교역을 막아 독일이 노르웨이를 공격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그 사이 독일 해군을 격파해 북해와 발트해 연안을 장악하는 작전이었다. 즉, 노르웨이와 독일 양국의 교역을 끊어 독일이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작전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4월 8일로 작전 실행일이 최종적으로 선정된다.


  양국 중 먼저 군대를 움직인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 해군이 4월 7일 노르웨이로 향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 차이로 독일이 영국보다 앞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날 오후가 되어 영국군도 독일군이 출발했다는 것을 알아챈다. 문제는 그들의 방향이었다. 영국군은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독일군이 자신들의 영해로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해군력은 영국이 독일은 압도하는 상황이었으나, 영국은 이 오판으로 인해 북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지만 독일군 함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목적지는 노르웨이 였다. 4월 8일 폴란드 망명정부가 보낸 어뢰 잠수정에 의해 나치의 리우 데 자네이루호가 침몰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폴란드의 통신을 받지 못하고 계속 독일군 함선을 찾는데 급급했다. 처칠은 윌프레드 작전을 전면 중지 시키고 독일군 수색에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독일 해군을 전혀 찾지 못하고 이들은 별다른 방해 없이 오슬로를 제외한 노르웨이 연안을 장악한다. 독일군이 전쟁을 개시한지 겨우 이틀 밖에 지나지 않은 4월 9일의 일이었다.



영국의 리나운급 순양함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이 맞붙다


  처칠은 윌프레드 작전에 투입될 선박을 독일군 수색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다. 영국군은 리나운급 전함 12척을 이용해 수색하게 된다. 그 중 리나운 전함을 호위하던 구축함 글로웜 바다에 빠진 수병 한명을 수색하기 위해 이탈하게 된다. 결국 병사를 찾지 못하고 귀환하던 도중 독일 군의 아드미랄 히퍼 급 중순양함에 발각되어 격침된다.


  글로윔을 격침을 당하는 순간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리나운급 전함이 글로윔이 격침당한 위치로 달려오게 된다. 그리고 4월 9일 새벽 4시 리나운급 전함의 위치를 확인한 독일 군 역시 샤른호르스트 급 전함 2척을 파견한다. 이들은 나르비크에서 출발하는데  여전히 독일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영국군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리나운의 후미를 공략해 자신들의 출발지를 들키지 않게 된다.


  리나운 역시 독일군 전함의 위치를 파악한다. 하지만 세계1차대전에 사용된 리나운급 전함이 독일군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상대하기 곤란했다. 리나운 순양함은 독일 전함을 상대로 선전 했으나 전함을 격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악천후까지 더해져 샤른호르스트의 추격에 실패하고 된다.


  

4월 7~9일 사이의 독일과 영국 해군 사이의 이동 경로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독일군


  혼란에 빠진 영국군과 달리 독일군의 공격은 매우 정교했다. 히틀러와 레더가 베저강에서 진행했단 훈련이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총리 요한 뉘고르스볼은 4월 8일 밤에 독일군의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긴급하게 내각 회의를 진행했는데, 동원령 선포 문제로 회의가 길어지는 사이 독일군은 이미 노르웨이 연안 대부분의 점령을 마쳤다. 4월 9일 새벽 3시에 총 동원령이 선포되며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한다.


  독일군의 첫번째 그룹이  나르비크에 도달해 독일군과 노르웨이 해군 사이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베저강에서 철저한 훈련은 받은 독일 해군과 전쟁 경험이 전무한 노르웨이 간의 전투 결과는 뻔했다. 노르웨이는 어뢰 하나 제대로 쏘지 못하고 나르비크를 독일군에게 뺴앗기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그룹 역시 트론헤임에 쉽게 상륙한다. 세번쨰 그룹의 목적지는 베르겐이었다. 이 지역의 반격이 거셌지만, 역시 점령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네번째 그룹의 목적지는 크리스티안산과 아렌달이었다. 아렌달 지역에는 노르웨이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해저 케이블이 존재했는데, 이를 파괴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다섯번째 그룹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가 목표였다. 오슬로 공격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노르웨이 요새의 집중 포화를 받은 브뤼허 전함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독일 군은 공수부대까지 투입하며 간신히 오슬로를 점령하게 된다. 마지막 여섯번째 그룹은 에게르순을 별다른 저항없이 함락한다.


  이제서야 영국군은 독일의 목표가 자신들과 같은 노르웨이 임을 눈치챈다. 한발 늦은 처칠은 노르웨이에 지상군을 투입하기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처칠과 영국 육군과의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처칠은 나르비크로 전함을 이끌고 이동하여 독일의 최종 목적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육군은 그마나 반격할 힘이 남아있던 트론헤임으로 이동해 나르비크와 독일 사이의 축선을 끊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군은 절충한으로 양 도시에 모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노르웨이의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



독일의 덴마크 점령


  독일 군은 이와 동시에 덴마크를 점령한다. 4월 9일 독일은 덴마크에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며 자신들이 덴마크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이런 헛소리를 믿을리 없었고, 영-불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문제는 그들이 구원을 오기도전에 국가가 함락될 운명이었다. 덴마크에 있던 병사 전부 끌어모아도 15,0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독일군을 상대로 단 하루라도 버티면 기적인 수준이었다. 결국 덴마크는 독일에 완전 항복하고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독일군은 우선 덴마크에 대한 행동을 끝냈고, 노르웨이에 대한 행동 역시 끝냈다. 노르웨이의 매국노이자 친독일 성향의 정치은 비드쿤 크비슬링은 나치가 침공해오자 앞장서 쿠데타를 일으키며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에 괴뢰 정부를 세우는데 앞장선다. 노르웨이 정부에서는 요한 뉘고르스볼과 크비슬링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친가지로 북해 연안에서는 점령당한 독일에게 점령단한 나르비크를 비롯한 노르웨이 연안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군이 지상군을 이끌고 노르웨이로 향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영국과 독일간의 1차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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