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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영국의 반격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과 육군의 견해는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영국군은 나르비크와 트론헤임으로 군대를 보내게 된다. 그 중에서 나르비크는 원래 영국의 목표 도시였던 만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영국군은 버나드 워버튼 리 함장에게 나르비크 항구를 정복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영국군은 독일 구축함 한 척이 나르비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나르비크로 향했다.


  나르비크에는 독일 구축함이 약 10척이 존재했다. 4월의 노르웨이는 안개가 엄청났다. 이 안개는 영국군에게 엄청난 호재로 작용하는데, 독일 군은 워버튼 리의 함대가 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워버튼 리가 이끄는 HMS 홋스퍼와 호스틀 호에 독일 구축함 Z21 빌헬름 하이트캄프를 미롯한 2대의 구축함과 유조선 및 보급 함 6척이 침몰한 것이다. 게다가 독일 군을 이끌던 지휘관 프리드리히 본테 역시 구축함이 침몰하면서 같이 사망하게된다. 독일 군은 막대한 수적 우위에도 영국군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다만, 전쟁을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독일군 소함대를 발견해 어뢰로 격침을 시도 했으나 실패하고, 하디 기함을 이끌고 이들을 격침하려 했으나 되려 독일군에 반격에 하디 기함이 손상되며 워버튼 리 함장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HMS 하보크를 이끄는 함장 리프 커리지 소령이 독일 군함을 향해 연막을 쏘며 간신히 홋스퍼와 헌터의 퇴각을 도웠다. 독일의 함장 에리히 베이는 영국군 함대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어쩔 수 없이 퇴각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는 최악의 수로 돌아왔다. 영국 군함은 오프트 협만에서 이탈해 항구로 돌아가는 독일 어뢰와 포탄을 운반하던 보금함을 추가로 격침 시켰다. 영국군은 비록 나르비크를 완전히 탈환하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제1차 나르비크 해전으로 독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버나드 워버튼-리



제2차 나르비크 해전


  나르비크에서 한번의 전투가 끝나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독일 군은 나르비크 사수를 위해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기회를 놓칠 영국 해군이 아니었다. 영국은 윌리엄 위트워스 장군이 이끄는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와 항공모함 퓨리어스를 나르비크로 돌진 시킨다. 이들은 4월 13일 나르비크에 도착해 독일군 구축함 8척과 U보트 1척을 파괴했다. 히틀러가 영국 해군과의 전면전을 지속적으로 피하려는 이유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구축함과 보급함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독일 군은 롬박스피오르로 구축함 대부분을 이끌고 피신했다. 독일 구축함 Z19 헤르만 퀴네가 후퇴 도중에 영국 구축함 HMS 에스키모를 잡아내며 그나마 체면 치레를 할 수 있었다. 워스파이트는 나르비크 주변에 있는 해안포 진지를 박살내는 목적으로 해안가를 수색 했지만, 해안포는 발견되지 않았다. 에리히 베이는 워스파이트의 사정거리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후 3시경이 되서 독일군은 모든 협반을 영국 수중에 뺏기게 되었고 나르비크 해전이 종결된다.


  영국 해군은 여전히 무서웠다. 지상전에서는 독일군이 아무리 뛰어날 지 몰라도 해상에서는 독일이 영국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르비크 해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북해 상부 지역의 제해권을 완전히 영국에게 내주게된다. 4월 14일 독일군이 버리고 도망간 나르비크로 다시 영국군이 상륙했다. 영국은 나르비크에 지상군을 내려 해당 지역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4월에도 폭설이 내리는 노르웨이의 날씨 때문에 점령 시점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노르웨이의 국왕, 호콘 7세




노르웨이의 반역자 비드쿤 크비슬링


  영국군은 해상에서 독일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내륙은 상황이 달랐다. 베저위붕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노르웨이 왕가는 하마르로 피난을 간다. 그사이 노르웨이의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스스로 노르웨이의 새 총리로 취임한다. 4월 15일 크비슬링 내각은 노르웨이 법원도 점령하고 행정 지휘권을 탈취했다. 크비슬링은 나치 독일과 협력하며 나라를 팔아 넘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독일 군대는 노르웨이의 국왕 호콘 7세를 잡기위해 노력했다. 하마르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호콘 7세는 엘베룸으로 피난을 갔다. 독일군은 호콘 7세에게 크비슬링 내각을 새 정부로 인정하라고 요구했지만, 호콘 7세를 끝까지 거부하며 항전을 이어갔다. 그는 노르웨이 보병 사령관 오토 루게 대령을 총 사령관으로 승격 시키고, 독일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게는 최대한 시간을 끌며 트론헤임에 상륙한 영국군 부대가 본토로 진입하기만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전역 당시 군 이동 경로 (출처 : 위키백과)




릴레함메르 전투


  트론헤임의 상륙한 영국 육군은 우리가 알던 영국 해군과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전투에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노르웨이 군은 이들에게서 많은 전쟁 물자와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 상각했지만 탄약은 겨우 이틀치 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전쟁에 대한 지식 능력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병사들이 박격포와 기관총도 사용할 줄 모르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따뜻한 잉글랜드 출신들은 노르웨이의 엄청난 추위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영국-노르웨이 연합군은 트론헤임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4월 20일 트론헤임을 탈환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연합군은 이 곳을 포기하고 동부 노르웨이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릴레함메르로 이동하게 되는데, 움직임을 알아챈 독일군에 의해 반격이 시작되었다. 21일 오후까지 전투를 이어갔지만 노르웨이에서 기세가 오른 독일 군을 막을 순 없었다. 이들은 결국 대패하고 다시 트론헤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움직임도 독일군 손바닥 안이었다. 트론헤임에서 대기중이던 독일 해군은 22일 연합군의 퇴로를 끊어 놨다. 그나마 이곳 지리에 익숙했던 허버트 중령이 영국군 수백명을 이끌고 간신히 독일군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독일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Ju87 급각하폭격기까지 동원하면서 영국군을 쫓았다. 양국의 교신을 위해 세워진 통신 지기와 보급소를 모두 폭격하거나 타뤼했다. 4월 28일 트론헤임에 파견된 병력이 궤멸 직전에 빠지자 영국 정부는 서둘러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중남부 노르웨이는 모두 독일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들의 퇴각로는 실시간으로 독일군에게 전달되었고, 5월 3일 완전 퇴각 시점까지 영국군은 지상에서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남소스




 노르웨이 본토 전역


  해상에선 영국군의 승리가 지상에선 독일군의 승리가 한창일 때, 독일군은 여전히 노르웨이 정부에게 크비슬링 내각을 정식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를 했다. 4월 19일 연합군의 프랑스도 노르웨이에 상륙했다. 영국의 아드리안 비아르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여단이 남소스 방면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이 한창이었다. 항공 지원이 빈약했던 연합군은 지속적으로 루프트바페의 공습에 노출되며 남소스에서 어려운 전쟁을 이어갔다. 이들은 스테인셰르 마을로 퇴각하였지만, 이곳 역시 독일 공군의 사정거리였다. 


  트론헤임에 있던 독일군도 스테인셰르 마을로 집결하면서 아드리안 장군은 퇴각을 지시했다.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독일군이 마을을 폭격하며 도시는 완전히 황폐화 되었고, 수천명의 민간인이 죽어나갔다. 결국 4월 24일 독일군은 남소스 방면과 스테인셰르 마을을 장악한다.


  4월 28일이 되자 더이상 연합군은 노르웨이 중남부 지방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지상병력에게 퇴각을 명령한다. 연합군은 온달스네스 항구에서 본국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5월 2일 연합군의 퇴각을 저지하려는 독일군 Ju87 항공기가 온달스네스 항구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탈출함을 보호하기 위해 출력한 프랑스 구축함 비송과 영국군 구축함 HMS 아프리디가 침몰했다. 5월 3일 퇴각 작전은 중지된다. 그렇게 트론헤임 지방을 완전히 상실한 연합군은 북부 노르웨이 지방 사수에 몰두하게 된다.


  5월 13일 연합군이 볘르크비크에 상륙작전을 펼치며 반격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미 연합군의 경로를 예상한 독일군은 볘르크비크를 모두 파괴하고 도망간 상태였다. 나르비크를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은 계속 북상했다. 독일은 항공기를 동원해 연합군을 괴롭혔다. 연합군은 끈질기게 나르비크를 공격해 5월 28일 드디어 탈환에 성공했다. 독일 군은 나르비크나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자 곧바로 공군의 대폭격으로 항구를 파괴했다. 



1940년 6월 유럽 세력도




연합군의 퇴각과 노르웨이 점령


  연합군은 5월 24일 노르웨이에서 완전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6월 1일에 이 사실을 노르웨이에 통보한다. 연합군의 도움이 끊긴 노르웨이는 더이상 독일과의 전쟁일 이어갈 수 없었다. 호콘 7세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 뒤 해외에서 투쟁을 계속 이어 갔다. 6월 8일 나르비크에서 빠져나가는 연합군 함대를 잡기 위해 독일군 구축함과 잠수정이 출격했으나 되려 영국군의 반격에 침몰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6월 9일 자정에 모든 전투가 중지되고 다음날 오후 5시 노르웨이의 랑느발 로셸 닐센 중령이 항복 조약에 서명을 한다. 그렇게 62일간의 노르웨이 전역은 마무리가 된다.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에 새로운 괴뢰 정부를 세웠고, 괴뢰 정부 대표는 당연히 비드쿤 크비슬링이 맡게 되었다. 독일은 노르웨이 정복으로 많은 전략적, 군사적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원했던 안정적인 철 자원 수급과 북방 해군 기지 모두 확보했다.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으로 독일은 대승이라며 축제 분위기였다. 이제 프랑스와 영국도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보면 달랐다. 독일은 두 차례의 나르비크 해전으로 해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나치가 그렇게 무서워 하던 영국 해군의 저력을 실제로 증명 된 것이다. 만약 처칠이 조금만 빠르게 윌프레드 작전을 수행 했다면 노르웨이 전선에 결과는 정 반대가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반대로 영국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해군의 대승은 당연한 결과고 이를 이용해 전략적 이득을 취했어야 했는데, 기회를 완벽하게 놓친 것이다. 처칠은 노르웨이 전역이 끝나고 곧장 수상인 네빌 체임벌린을 강력하게 비판해 그가 실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수상으로 새로 임명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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