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상황 발발 덩케르크를 독일군에게 함락하며 프랑스는 마지막 남은 북부 지대를 모두 헌납하게 된다. 영국 해협 연안의 모든 도시를 차지하며 근방의 제공권 마저 빼앗기게 되며 영-불은 서로 작전을 공유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전락한다. 연합군은 황색 상황이 지속 될 동안 총 140여개 사단 중 61개의 사단이 무너지며 절반에 가까운 병력 손실을 입게된다. 프랑스의 패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원수 베이강은 파리 근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비를 마친 B집단군이 이제 파리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금새 무너질것이라고 예상한 베이강의 방어 전술이 의외의 효과를 보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지켜야할 전선의 크기를 줄이면 방어하는 입장에선 더욱 효율적이다. 게다가 프랑스..
구데리안의 도박 독일의 보수적인 군사 지휘관들은 여전히 구데리안의 빠른 전차전에 대해 우려했다. 이는 우려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데리안을 해임하는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그의 상급 지휘관이었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노력으로 다시 군단장으로 복직할 수 있었지만 어쩃든 여전히 독일의 군사 지휘관은 구데리안을 저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프랑스 침공 성공의 7부능선을 넘은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내부 문제로 골머리를 썩혀가고 있었다. 바로 구데리안이 해임된 5월 17일과 18일 이틀간 독일군은 침공을 중단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빠른돌파를 걱정해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에게 침공을 잠시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히틀러는 세계 1차대전에서 독일군이 너무 빠르게 전진하다 마른에서 후위를 노출당해 패배한 기억이 ..
아르덴 공세의 시작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드디어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프랑스에 혼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B집단군을 전날부터 운용하며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를 공략했다. B집단군에는 다수의 공수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활용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적극적으로 군대를 파견해 방어 지점에 대한 혼란을 야기했다. A집단군도 벨기에로 출발했는데, 문제는 대규모 병력이 좁은 길목을 지나가면서 발생하는 엄청난 교통체증이었다. 구데리안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독일 군은 기갑 부대를 동원했지만, 넓은 부피를 차지하는 전차의 특성상 빠른 벨기에 진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기갑 병력을 좋게 보지 않고 있던 룬트슈테트는 기갑 병력에 대한 개선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준비 다시 시계를 돌려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끝마친 1939년 10월로 돌아가보자. 독일군은 레벤스라움 건설을 위해 슬라브족의 터전인 러시아를 공략해야한다. 하지만 세계 1차대전에서 양면전 돌입으로 대패한 교훈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지역 공략전 반드시 서부 전선에 대한 안전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 강화 요청을 제안하지만,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한다. 결국 히틀러는 총통 지령 6호를 발동하며 프랑스 침공을 계획한다. 폴란드와 프랑스는 차원이 다른 상대다. 세계 1차대전때 독일 군은 프랑스 점령을 목표로 프랑스 진공을 진행했다. 1905년 독일의 육군 참모창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프랑스 침공에 대한 작전을 내고 이것이 1차 대전의 대..
영국의 반격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과 육군의 견해는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영국군은 나르비크와 트론헤임으로 군대를 보내게 된다. 그 중에서 나르비크는 원래 영국의 목표 도시였던 만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영국군은 버나드 워버튼 리 함장에게 나르비크 항구를 정복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영국군은 독일 구축함 한 척이 나르비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나르비크로 향했다. 나르비크에는 독일 구축함이 약 10척이 존재했다. 4월의 노르웨이는 안개가 엄청났다. 이 안개는 영국군에게 엄청난 호재로 작용하는데, 독일 군은 워버튼 리의 함대가 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워버튼 리가 이끄는 HMS 홋스퍼와 호스틀 호에 독일 구축함 Z21 빌헬름 하이트캄프를 미롯한 2대의 구축함과 유조..
베저위붕 작전 에리히 레더의 노르웨이 침공 작전이 1940년 1월 10일 완성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해당 계획의 수정을 원했고, 레더는 다시 수정된 작전은 2월경 히틀러에게 전달된다. 이는 독일 북부에 존재하는 강 이름을 따 베저위붕 작전이라고 명명된다. 원래 처음부터 독일은 베저위붕 사건을 채택할 생각이 없었다. 나치 독일의 목표는 영국이었다. 하지만, 1940년 2월 16일 발생한 알트마르크호 사건이 독일은 노르웨이로 몰고 갔다. 알트마르크호는 연합군 포로 299명을 싣고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히 영국 영해를 항해할 경우 발각되므로 이들은 노르웨이 영해쪽으로 우회하여 독일로 귀환을 하고 있었고, 영국군은 알트마르크호를 쫓고 있었다. 노르웨이군은 중립법에 따라 자신의 항구에 들어오는 ..
소련의 반격 스탈린은 자신의 친구이자 혁명 동지 보로실로프를 실각시켰다. 그리고 새로 군사에 대해 정통한 세몬 티모셴코를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티모셴코의 공격은 이전의 소련군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는 항공기를 적극적으로 가동시키며 만네르하임선 후방을 공략했다. 아무리 뛰어난 방어능력을 자랑한 만네르하임선이라 할지라도 후방과의 보급을 필수적이었다. 결국 핀란드 군은 제때 보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사기는 점차 떨어졌다. 보로실로프와 티모셴코의 가장 큰 차이는 여유로움이었다. 보로실로프는 전쟁을 빨리 끝내야 된다는 압박감에 무의미한 공세를 수차례 펼치고, 핀란드 군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반면 티모셴코는 전쟁을 장기적으로 보면서 공군략과 야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투를 ..
스탈린의 서부 팽창정책 1930년대 스탈린 정권 하의 소련은 대단한 성장을 이룩한다. 러시아 제국때는 미뤄두었던 공업화에 성공해 사회 기반은 점차 탄탄해져갔고, 군수 물자도 대거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이전부터 러시아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는데, 바로 흑해와 발트해의 부동항 확보였다. 러시아는 겨울이 되면 대부분의 항구가 얼어 겨울엔 교역이 불가능 했다. 그렇기에 스탈린은 발트3국의 부동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확보를 통해 대서양으로 향하는 항구를 확보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히틀러라는 동반자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폴란드 점령을 완료하며 동유럽에서의 패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이제 소련은 대서양 진출을 위한 북유럽 점령을 시도하게 된다. 스탈린이 넘어야할 산은 발트..
독소 폴란드 분할 통치 1939년 10월 6일 한달여 간의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이 독소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폴란드는 양국의 협공으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국가 주권을 양국에 넘기게 된다. 앞서 체결한 독소 불가침 조약에 의거하여 양국은 폴란드를 절반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 하기로 한다. 양국 모두 폴란드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터라 이들의 폴란드 통치 방침은 민족 말살이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도 이 시기 부터다. 당시 폴란드에는 많은 유대인계 폴란드인들이 있었다. 다민족 협의 국가였던 폴란드였던 만큼 유대인, 게르만인, 슬라브 인들이 모두 같이 살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했는데, 바르샤바의 총 인구수의 30%가량이 유대..
소련의 참전 브주라 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9월 17일, 폴란드는 자신들과 우호 관계라고 믿었던 소련에게 뒷통수를 맞는다. 스탈린은 원래 나치 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한 시점에 폴란드로 공격해 들어올 계획이었는데, 바르샤바 공략이 예상보다 오래 걸리자 곧바로 폴란드 국경을 넘어 공격을 시작했다. 폴란드는 소련이 우호 세력이라고 믿었던 것 만큼 동부 지역에 병사들을 전부 독일을 막기 위해 서부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다는 명분을 바로 국가 붕괴가 눈앞인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주민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미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통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시 소련도 폴란드를 공격하고 분할 통치 하는 것으로 협상이 완료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