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drian0220.tistory.com/177) 해방 이후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이었지만 실상을 전혀 달랐다. 건준위의 노력으로 치안은 어느정도 유지되었지만 여전히 국가 방향을 놓고 많은 사상가와 정치인들이 충돌했다. 그러자 미군정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미군정을 상대로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건준위을 중심으로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당연히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좌익 정치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을 좌우 합작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미국, 우파 정치인과 협상을 위해 서울을 비운 사이 박헌영이 여운형을 내쫓고 인민공화국 인사들을 전부 좌익 정치인으로 바꿔버린다...
국가의 독립과 통일 대한민국을 꿈꿨던 좌우 통합 지도자 VS 자신의 사상적 기반 없이 좌우 합작만을 바란 실속 없는 기회주의자 나는 사람마다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인물을 좋아한다. 그사람이 지난 가치관에 따라 과오가 갈리고 혹평과 호평이 모두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특히나 좋아한다. 그 이유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현대에 오면 입체적인 인물 들은 더욱 많아진다. 이번에 소개드릴 여운형 역시 사람마다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혼란의 연속이었던 대한민국 해방정국에서 가장 빛이 났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대통령을 맡을만한 그릇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그가 대통령에 올랐다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대체 여운형은 누구..
10월 혁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레닌은 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외무장관에는 레프 트로츠키가 올랐고, 민족인민위원직은 스탈린이 맡게 되었다. 세계에 유래가 없었던 노동자국가의 탄생이었다. 혁명은 비교적 조용히 이뤄졌고, 많은 사상사가 발생되지 않은 평화적 혁명이었다. 그렇게 훗날 세계 초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는 노동자들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 했다. 더이상 지속이 의미가 없던 독일과의 전쟁을 끝냈다. 혁명 기간동안 멈췄던 많은 기간 산업을 재작동시키며 국가가 다시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은행의 금리를 동결시키고 주요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레닌은 자신들의 친 노동자 정책..
부조리를 혁파하고 사회 정의를 이룩한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 VS 대중을 광기에 내몰고 참혹한 공상 사회를 만든 미치광이 아마 몇십년 전에 다뤘다면 큰일 날지도 몰랐을 한 인물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으로 말할것 같으면 좋은방향으로든 나쁜방향으로든 20세기 지구 역사에 큰 획을 차지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열강의 시대였던 19세기를 뒤로하고 많은 나라들이 현대화를 이룩하며 20세기는 자본과 냉전의 시대로 흐른다. 그리고 이 냉전 시대를 연 한 축은 바로 사회주의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으며 영향력 있던 인물을 다뤄보고자한다. 바로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이 사람의 일생은 간단히 설명이 안된다. 레닌을 알기위해선 어떻게 레닌이라는 사람이 튀어나오게 되었는지 부터 차근차근 살펴..
조선 말기, 조선 왕실에 탄생한 마지막 희망 VS 정통성과 외모로 과대 평가 받고 요절한 거품형 군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급속도로 병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노론 벽파와 시파의 싸움이 지속되었다. 정조가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쳐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힘이 없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매우 약한 왕이었다. 노론 벽파 세력은 사사건건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며 부패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했다. 평소에도 과로로 건강이 안좋은 정조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순조가 즉위했다. 그리고 1812년 순조의 왕비 순원숙황후의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된다. 왕비 소생 세자가 드디어 왕세자로 책봉 된 것이다. 아버지 순조 역시 후궁의 소생이었다. 숙종 이후로 오랜만에 왕비 소생이었던..
미국 헌법과 경제 체제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 VS 귀족 주의와 연방 주의로 신대륙 정신에 어긋난 사상가 자유 사상의 뿌리는 유럽이지만, 자유주의라는 꽃을 피운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람들이 이동한 이래 아메리카 인들은 유럽과는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사상과 정치 체제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왕이 없는 나라,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미국의 지식인들은 한데 모였다. 유럽의 고지식한 전제 군주제와 다르면서 하나의 정부에 시민과 연방의 힘을 모으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필요했다. 이 정신에 기반해 미국 헌법을 작성하고 자유방임주의를 미국에 이식해 지금의 초강대국을 만드는데 정치적 기반을 닦은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 알..
세계 최강 몽골군의 침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VS이완용에 못지 않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강의 매국노 집안 여몽전쟁의 주요 인물 3명 중 마지막 시간이다. 여몽전쟁 기간때 우리의 많은 선조들은 당대 세계 최강 몽골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꼭 고려를 위해서 싸운 사람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기간이나 전쟁시간에는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도 존재했다. 이번에 알아볼 홍복원 역시 몽골의 앞잡이로 전향한 대표적인 고려의 매국노이다. 몽골이 칩입하자 앞장서 몽골의 길을 터주고 고려를 위험에 빠뜨린 악질 인간이다. 특히나 홍복원 같은 경우는 본인만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무려 4대가 몽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몽골로 넘어가 관직생활을..
리비아의 근대화를 이룩한 유능한 지도자 VS 자국민 학살과 탄압을 자행한 냉혈한 독재자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열강의 시대가 끝나고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필두로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 시기에 많은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하지만 기존 기득권과 국민들 사이에는 각자 바라는 정치 체제가 달랐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제3세계에선 군사력을 기반으로한 독재 정치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지금 알아볼 리비아와 무아마르 카다피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비아는 세계 전쟁 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의 주 무대로, 이 기간 나라가 크게 쇠퇴했다. 하지만, 석유붐과 더불어 리비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손에 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군사 쿠데타를..
여몽전쟁의 전황을 바꾼 고려의 맹장 VS 얻어걸린 승리로 얻은 과장된 명예 1231년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몽골의 대칸 오고타이는 살리타에게 군사를 주어 대대적으로 몽골으로 침공한다. 약 30여년간의 전쟁을 끝으로 고려는 몽골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부마국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고려는 무려 1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130년의 기간 동안 몽골은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히고 국력은 심각하게 나빠진다. 여몽전쟁에서 고려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고려의 영토 전역에 몽골군이 샅샅히 침입했고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패전을 거듭했지만 의미없는 승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몽전쟁 기간 중 고려에 가장 기념비적인 전투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처인성에서의 ..
가톨릭 부흥과 중세 유럽의 헤게모니를 연 새시대 출범의 상징 VS 봉건제와 전제 교황권을 연 유럽 암흑기의 상징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카톨릭 정교회의 힘은 날이 갈 수록 커져갔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황금기로 강성해진 동로마 제국 이슬람 세력의 방패 역할을 하자 유럽 정교회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결국 로마의 교황이 게르만족이 세운 나라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 대제에게 로마제국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할 정도로 교황청의 힘은 유럽의 왕국들의 왕권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출범이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 되었으나 카를로스 대제로 부터 이어진 신성로마제국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들은 교황의 선언으로 성립된 국가인 만큼 교황청의 지속적인 간섭을 받아왔다. 중간에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