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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잘나가던 가발 생산 업체였던 YH 무역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70년대 경제 호황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YH는 동시에 외화 반출, 불법 해고 및 감봉 등 좋지 못한 일들도 저지르고 있었다. 특히,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매우 열악했던 회사였다. YH무역의 노동조합의 핵심 인물인 김경숙 등을 부당하게 해고하거나 주요 노조 직원들을 다른 지부로 발령을 보내는 등 약화를 위해 노력했다.
회사의 노동자에 대한 부당 대우가 계속되던 와중, 1979년 3월 29일 YH측은 노조의 임금 인상요구, 적자 운영 등을 빌미로 회사를 4월 말에 폐업한다고 공고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조와 회사측은 협상을 진행했고, 다시 회사를 정상화 하기로 경영진으로 부터 약속을 받는다. 하지만 사측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결국 직원들의 불만을 최고조가 되었고 농성에 돌입한다. 노동자들은 긴급대의원을 열었고 7월 30일까지 회사를 정상화 하지 않는다면 종합원 총회를 열기로했다. 사측은 당연히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YH 여공들은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야간 농성에 돌입했다.
YH 여공들의 노동 운동이 서슬퍼런 유신정권이 붕괴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게 될 줄은 이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사측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노동자들은 회사에 퇴직금과 부당 해고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나 대표 장용호 회장은 이미 미국으로 도주한 이후였다. 노동자들이 기댈 곳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여공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신민당사를 집회 장소로 흔쾌히 내주었다. 여공들은 마포구에 있던 신민 당사에서 농성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김영삼을 비롯한 신민당 측에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노동청에 연락하며 조속히 회사를 정상화 하고 YH대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경찰병력을 동원해 농성을 진압했다.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공들을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김경숙씨가 사망하는 듯 정부의 탄압은 정도를 지나쳤다. 심지어 신민당 국회의원까지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연행된다. 진압 당시 김영삼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서울시 경찰국장이 신민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했는데, 김영삼은 건방지다고 전화를 바로 끊어 버렸다. 그리고, 진압하러 온 경찰 대원 대장에게 여공들 다 죽일거냐며 싸대기를 날렸다고 전해진다.
김영삼을 정계에서 축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찾던 정부는 이 사건으로 쾌재를 불렀다. YH 농성 사건을 빌미로 정부는 김영삼을 강제 구금하고 직무 정지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내렸다. 당시 정부로서 김영삼은 눈엣가시였다. 야당의 총재이면서 유신 정권에 반대 민심이 많은 PK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다. 더군다나 김대중과 더불어 차기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인사였다. 결국 10월 4일 정부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해직 시키게된다. 이 사건은 PK 민심에 큰 불을 지피게 된다. 70년대 데모 안하기로 소문이 나 비난을 받던 부산대학교 측에서 먼저 일어났다. 부산대 5000여명의 학생들의 데모를 시작으로 부산의 민심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 다른 학교와 시민들도 동참하기 시작하며 남포동과 부산 시청 앞은 인파로 가득했다.
부산의 데모를 시작으로 마산까지 항쟁은 번졌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유신정권은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며 진압에 나섰다. 부산과 마산을 비롯해 경남 진해, 창원까지 농성을 번졌다. 가뜩이나 박정희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던 부산, 경남 지역의 집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이들은 유신 정부의 종말과 대통령 직선제, 김영삼 국회의원의 복직을 요구하며 집회를 이어나갔다. 계엄군은 시위를 더욱 강경하게 진압하며 경남의 민심을 누르려고 시도 했다. 1979년 유신정권에 대한 민심은 최악이었다. 잔혹한 유신 헌법으로부터 민심은 이미 돌아선지 오래였다. 박정희는 권력 유지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이는 민심을 점점 더 나빠지게 할 뿐이었다. 10월 15일 민주 행장이 시작된 이후로 나흘간 무려 1500명 이상이 연행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이 제4공화국 최대의 시민 항쟁인 부마민주항쟁이다.
제4공화국은 긴급조치와 계엄령이라는 2개의 무기를 통해 민심을 억누르는데 최선을 다했었다. 이를 이용해 유신 정권동안 부마항쟁처럼 대대적인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의 권력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잘 누르고 있었다.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국지적 데모만 일어났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의 규모는 이전 집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역적인 규모로 일어난 집회였다. 이로 인해 부마 항쟁은 제4공화국 붕괴에 큰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이후 일어나게 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미친다. 4.19 혁명에 이후 일어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항쟁은 당시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만들었다. 박정희 역시 이를 심상치 않게 봤는데 차지철 경호실장과 한 말이 충격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4.19를 언급하면서 당시에는 발포 명령을 한 곽영주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대통령이 발포 명령을 하면 누가 자신을 사형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즉, 사건이 더 커지게 되면 발포명령을 자신이 직접 내릴 것이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리고 차지철 역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언급하면서 100~200백만명쯤 학살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발포 명령을 내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부마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징조를 보이자 정부는 실제로 서울에 까지 계엄령을 확대할 징조였다고 말한다. 이 사태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충격에 빠졌다.
결국 부마 민주항쟁은 몇일 후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게 되는데 중요한 발판이 된다. 김재규가 단순히 자신이 권력에서 멀어짐에 따른 반발심에 의해 암살을 기획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물론, 이 역시 그가 저격을 택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YH사건으로 인해 여공들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장소인 신민당사로 대피 했고, 김영삼은 그들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김영삼이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자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항쟁이 시작되었고, 이 와중에 대통령과 경호 실장이 킬링필드 얘기나 하고 있자, 김재규는 대통령을 암살하며 10월 유신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YH상사의 노동자 해고에서 시작된 나비효과였다. 여공들의 노동운동이 전국민적인 항쟁으로 변모한 재밌는 사건이다.
YH사건은 당시 노동 환경의 열악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태일열사가 1970년대 분신투쟁을 한 이후로도 사실 크게 달라지지 않은게 현실이었다. 국내 노동환경이 좋아지게 되는 시기는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 환경에 관해 지적하는 정치인들이 정계로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70년대 노동 현장에서는 임금 체불, 부당 해고 등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부마 항쟁은 민심이 유신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음을 보여준다. 이전에 학생 시위와는 비교과 안될 정도의 큰 민중항쟁이었다. 시민들은 유신정권에 심판을 내릴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줬다. 박정희는 민중 항쟁이 전국적으로 퍼질 조짐을 보이자 군 투입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군 투입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10.26사건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목숨과 안전은 지켰다고도 예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YH 사건을 보며 참 역사의 예측 불가성에 대해 다시한번 놀란다. 우리가 사소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사실 훗날 대 사건의 전조가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YH사건과 부마민주항쟁은 우리에게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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