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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은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란을 꾀한다고 말하며 일단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중이라고 발표한다. 김형욱은 간첩 김영춘이 모종의 임무를 가지고 남하하여 인혁당을 1962년 조직했고, 한일 협정 반대 데모를 선동하고 현 정권의 타도를 꾀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사건은 곧바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조사 과정에서 관련 인물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진행했으나, 당시 사건을 맏았던 담당 검사 조차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어떻게든 사건을 어떻게든 기소해 해당 인물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 정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
당시 시대상 분명히 북한의 간첩활동이 존재했고, 일부는 제3공화국 정권의 붕괴를 꾀하며 조직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분단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한 내에서도 사회주의 인사들이 많았고 이들을 실제로 북한의 지령을 받기도 했다. 이전에 말한 유신 정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박정희 정권은 이런 사회상을 적극 활용했다. 실제로 간첩 행위를 처벌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정권에 비난을 하는 주요 인사들을 처벌했다. 인혁당 사건 역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건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징역 3년 정도로 사건이 끝났으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신 헌법이 선포되고 새로운 공화국이 시작되며 점차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시민들에 대한 탄압 행위를 강화하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커져갔다. 1974년 반유신 저항운동이 학생들 사이에서 거세게 일어났고, 정부는 이를 잠재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는 학생 데모 배후에 공산당이 개입했다고 발표한다. 이 사건이 바로 민청학련 사건이다. 정부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민청학련을 검거하기 위해 대학생 휴교를 지시하고 집단 행동을 일체 금지했다. 중정부는 비상군법회의를 만들어 반유신 인사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등 유력인사들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 민청학련에 대한 혐의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검찰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하는데, 바로 인혁당을 해당 사건의 배후로 연결시킨다. 이 사건이 바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주도자들에게 갖가지 고문을 행하며 이들에게서 인혁당이 배후에서 자신들을 조종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 인권 탄압이 일어났다. 결국 정부는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있다고 발표하고 연루자들을 기소한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대법원까지 넘어가는데 채 10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3심제도가 도입된 우리나라에서 대법원 재판까지 불과 10개월에 넘어갔다는 점은 절대로 보편적인 경우가 아니다. 정부의 입김이 존재했을 확률이 매우 높고, 이 자체로도 사법권 침해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형량은 변화가 없었다. 이로서 총 8명의 희생자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충격적인 일은 여기서 일어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 하며, 원심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선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 8명에게 형이 집행된다. 형량이 집행된지 겨우 18시간만이었다.
18시간만의 사형. 8명이 실제 간첩이라고 가정해도 너무 성급한 형 집행이다. 실제 간첩이라면 오히려 형 집행을 빨리 해서는 안된다. 간첩들은 적국의 정보국에서 온 만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파이를 생포한 입장에서 그들에게 몇가지 제안을 하며, 정보를 캐내거나 그들의 목숨을 쥐고 적국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도 있다. 그렇기에 실제 간첩이라면 쉽게 죽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사형 선고가 더 찜찜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8명의 사형수를 재빠르게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살아있으므로 자신의 정권에 큰 해가 되기 때문에 18시간만에 살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법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즉, 빠른 형 집행이 오히려 이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근거를 만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8명이 희생자는 물론이고, 유족들 마저 비참한 삶은 살게 된다. 사형 선고 다음 날 위로차 면회를 간 가족들은 이미 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이들은 심지어 곳곳에서 간첩의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다. 실제로 희생자 하재완 씨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아이들이 자신을 새끼줄로 목에 매고 충살놀이를 당했다고 한다. 희생자 송상진씨의 아내는 죄책감에 자식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본 친정어머니가 다행스럽게도 막았으나, 친정어머니도 4년후 충격으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던 평범한 가정이 사법살인으로 인해 처참히 파괴되었다. 인혁당 사건의 유가족들은 오랜 시간동안 뜻하지 않은 수모와 비난을 받으며 살아갔다.
심지어 유신 정권은 희생자 8분의 시신조차 유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유족의 동의 없이 시신을 화장했다. 아마 해당 시신에는 고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고, 이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웠던 유신 정권이 재빠르게 화장을 실시 했을것이라고 추측된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이 과정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 이들에 대한 고문, 형 집행, 화장 등 정권의 잔혹성을 지적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국제적으로도 수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전격 처형당한 8명은 국제 사법 역사에 비추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집행이었다.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보수파 언론 조차 해당 사건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듬해 당선되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도덕 정치를 내세워 당선되었는데, 이 사건이 한미 관계를 냉각시키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유신 정권이 미국 및 국제 사회로 부터 비난 받게 되고 외교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적인 비난을 말할 것도 없었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함께 1975년 유신 정권에 대한 반발을 크게 일으켰다. 이후 치러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참패를 하게 되며 민심은 돌아선다. 앞서 말한대로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기독교 인권위원회는 해당 사건 진상 규명에 앞장섰다. 인혁당 사건 이후, 조금 남아있던 유신 정권 지지자들은 크게 돌아섰고 1979년 김재규에 총에 의해 암살 될때까지, 청와대 및 정부 주요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당시 재판에 참가한 대법관 중 이일규 대법관 만이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이일규 대법관은 항소심에서 재판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의 조작된 정황을 지적하며 유족들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사법부 내에서도 해당 사건에 대해 다시 파헤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기에 재조사를 실시했다. 결국 2005년 재판을 다시 시작했고, 2007년 사형선고가 내려진 8명의 사형수에게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죄가 선고되었다.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려 8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무죄가 입증되었다. 하지만, 유신 정권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고 가정이 파괴되어 주변인들을 괴롭혔다. 어떤 말과 보상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형 반대론자들에게 큰 힘을 심어주게 된다. 18시간만의 사형 집행이라는 충격적이 사건을 보며 사형제도라는게 과연 필요한가 생각하게 만든다. 제 아무리 국가라고 한들 범죄가 있다는 사실로 살인이 합법화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사형 제도를 권력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처벌한 끔찍한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으킨 대표적인 사법 살인이었다.
흔히 일부 보수 지지자 및 언론들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인혁당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인혁당 사건의 큰 문제점은 국가가 사법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해당 사건이 진행 과정에 있어 부당한 고문이 있었는지, 피고인들의 자백은 고문으로 인해 나온 진술 이었는지, 법원은 피고인들의 진술과 증언에 대해 제대로 들고 판단했는지, 재판 진행 과정에서 국가 권력의 개입은 없없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백번 양보해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치더라도, 사형수에 대한 18시간만의 사형을 집행이 정당한지 판단을 해야한다.
사법은 그 잣대가 공정해야한다. 함무라비 법전 서문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고 한다.
이 땅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하여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법은 정의를 실행하는 도구이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법은 공정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어야한다. 법의 공정성을 위해 국가 권력 조차 사법부에 손을 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자에 손에 법이 들어가게 된다면, 법은 더이상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인혁당 사건은 법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법은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법이 권력자나 일부 세력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항상 지켜보고 견제할 줄 알아야한다. 우리의 삶과 자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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