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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새로운 유신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첫번째 친위쿠데타이자, 제4공화국의 출범을 알리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박정희 정권 이후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국민들은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1975년 대선을 준비했던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등 주요 정치 인사 역시 유신 정권으로 인해 대선 준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이후 대한민국은 이름만 민주주의일뿐, 사실상 1인 독재체제로 돌아서게 된다. 권력을 놓고 내려오겠다는 대통령은 약속을 어기게 된다.

 

 박정희는 왜 유신헌법을 만들었는가? 아무리 독재정권이라도 형식상의 선거는 진행한다. 냉전체제하에서 정권을 유지하려면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미국과 소련의 눈치를 잘 살펴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게다가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통성을 강조하고, 통치력을 확립하기 위해 독재자들을 항상 선거를 실시한다. 1971년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으나 당시 경쟁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전으로 적은 표차로 당선되자 큰 실망에 빠졌다. 이후 총선에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힘겹게 과반의석에 성공하며 정치 입지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라는 박정희의 약속에 국민들이 한번 더 그를 믿고 표를 주었을 뿐,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는 야당에게 권력을 뺏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심지어 3선 개헌 당시에도 여당 내에서 반발이 매우 거셌기에 4선을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독재자가 불안한 입지를 탈피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있다. 국가 체제를 이용해 그저 대통령직책만을 얻는 방법이 있다. 바로, 국가가 가진 법이라는 속성을 이용하는 부정선거라는 방법이다. (물론, 부정선거 자체가 불법인건 아이러니 하다.) 하지만, 이 방법을 썼다가 정권 유지는 커녕 국가에서 쫓겨나게 된 이승만의 사례가 있었다. 더군다나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있는 세력이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앞서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분노하여 4.19혁명을 일으킨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하며 형성된 세력이다. 당내에서도 호응을 얻을 수 없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바로 선거법 자체를 뜯어 고치는 방법이다.

 1971년 박정희는 국가보위법을 제정하며 유신 체제를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선포한다. 통일을 위한 새 헌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유신 헌법을 선언한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박정희는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비상조치를 선언했다. 당시 헌법에 당연히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은 없다. 하지만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국회를 해산한다. 야당 주요 인사들을 잡아가고, 강제로 정당 활동을 중단시킨다.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11월 12일 이뤄졌으나, 이 자체 역시 부정선거로 이루어졌다. 투표소 앞에 총을 맨 병사가 있고, 찬성을 찍는지 반대를 찍는 지 훤히 보이는 투표소가 존재했다. 10월 계엄령이 선포되어 길거리에는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언론 보도와 집회가 금지되어 국민들은 투표에 대한 내용 전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하에서 91.5%에 압도적인 찬성으로 유신 헌법은 통과된다. 저런 높은 찬성율의 비결은 유신헌법 조항 하나하나 너무 눈물겹도록 위대하고 주옥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 주옥같고 위대한 유신헌법의 주요 조항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


 독재자들이 형식상으로나마 유지하던 직선제가 드디어 폐지되고, 간접선거로 돌아서게 된다. 미국의 간선제를 생각하면 안된다. 미국의 간선제는 이미 어떤 사람을 찍을지 정해진 사람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는 방식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는 정권의 하수인으로 구성된 200명이 대의원으로 선발되어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대위원들이 모여서 대선 후보에 대해 국가 정책과 국가를 키워나갈 비전을 분석한다. 아주 철저하고 심도있는 비교와 검증을 통해 대위원들은 투표하게 되는 너무나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만장일치로 다음 대통령에 박정희가 지목된다. 국사시간에 배운 화백회의가 1500년 이후 다시 한반도에 나타났다. 정말 놀랍다. 그리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을 주목해보자. 저 기관은 회의를 하지도 않았고, 국민이 주체도 아니었으며,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니, 제4공화국 공무원들의 네이밍과 브랜드 메이킹 센스에 감탄한다.


2.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아까 그 회의가 또 나왔다. 이 회의에서 1/3이 국회의원을 선출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통일에 관한 회의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넘어가자. 민주국가에서 3권 분립은 기본이고, 각자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 대통령은 행정기관의 수장이고, 각각 사법기관과 입법기관에 대해서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 하지만 유신체제 하에서는 국회의원의 1/3이 대통령 추천으로 들어가게 된다.


3.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 부여


 이젠 사법도 건드린다. 대통령이 사법도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는 권력이 부여된다. 연산군이 칼을 들고 즉결 처형을 하는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국가는 일정한 법 체계가 존재하고, 아무리 흉악한 연쇄살인범이라 하더라도 일련의 사법과정을 거쳐 집행을 받게 된다. 국가의 기초적인 기능까지도 마비시킬수 있는 막대한 권한이었다.


4. 국회 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 할 수 있도록 보장


 사회 시간에 국가 아래에 3권이 나누어져 있고, 입법기관의 수장은 국회의장이고 사법기관의 수장은 대법원장이며, 행정기관의 수장이 대통령이라고 배웠다. 제4공화국 사회시간에 국가체제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한번 교과서를 보고싶어지는 대목이다. 앞서 말한 2개의 조항보다 더 강력하게 3권을 제어할 수 있다는 조항 정도로 해석하면 될듯하다.


5.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함.


 난 참 이 대목이 제일 좋다. 얼마나 솔직한가? 전세계 어떤 권력자가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가? 앞의 이승만도 그랬고 훗날 전두환 대통령 역시 형식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며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가? 지식인들 고문하고, 시민들의 집회를 제압하고 고생이 많았는데, 박정희는 대놓고 헌법에 명시해놓았다. 법 조항 들먹이며 어쨋든 법은 지켰냐느니, 당시 시대상을 비추어보면 불가피 했다느니의 변명이 전혀 통하지 않게 대놓고 헌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없앤다고 못 박아 놓았다. 후세의 사람들에게 헌법 조항에다가 자신의 독재에 대해 명시해놓았다.


 유신 헌법으로 발생된 재밌는 일도 있다. 제9대 대통령 선거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진행되자, 재야 민주 단체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리게 된다. 당시 ‘반공 교과서’에는 북한의 선거제도를 설명하며 실질적으로 반대를 할 수 없으며, 항상 99%이상의 투표율과 찬성표가 나온다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유인물의 앞면에 교과서의 해당 부분을 넣었다. 그 다음 유인물의 뒷 면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의 투표율과 찬성표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신문기사를 그대로 붙여놓았다. 반공교과서의 대목과 신문 기사를 그대로 첨부했기에 유인물 제작자를 처벌 할 수가 없었다. 교과서와 기사를 첨부한 유인물로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표현하며 정부의 비민주적 행태를 저격한 기가 막힌 유인물이었다.


 유신헌법 이후의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되었고,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박정희는 5.16군사정변 이후 가지고 있던 일말의 정통성 마저 놓게된다. 민주적 정당성을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민주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매우 심했다. 유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민주공화당 내부에서의 지지가 있었기에 경제 개발 정책도 진행할 수 있었고, 야당에 대한 견제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크게 실망해 지지율이 급락하게 된다. 제3공화국에서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김종필 역시 그에게서 돌아서게 되면서, 점차 박정희 주위에는 사람이 남지 않게 되었다.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는 박정희 정권이 마지막 발악이 되버린 결과가 되었다. 10월 유신 이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대표적으로 YH사건과 부마 민주항쟁은 결국 유신 헌법 선포에서 시작되었고, 훗날 일어난 10.26사태에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 과정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모습을 본 당시 육군에 있던 전두환은 이를 보고 그대로 훗날 적용한다. 12.12사태 이후 실권을 잡은 전두환은 다시 한번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게된다. 만약 대통령을 계속 직선제로 뽑았다면, 전두환이 아무리 여론 조작과 국민들을 탄압하더라도 쉽게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간접 선거로 바꾼다고 했을때, 국민들의 반발이 상당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헌법에 대한 별도의 수정 작업 없이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된다.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 뿐만 아니라 제5공화국의 출범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을 박정희 정권이 유신 헌법에 대한 통보를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했다는 것이다. 1972년 10월 31일자 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 문건에 따르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0월 12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서, 남북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 10월 유신에 대한 명분은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의 방어였다. 북한 역시 이에 맞춰 종신 집권을 위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반발을 누르고 각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철저한 적대적 공생 관계였다.


 10.26 사태로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할 때까지 10월 유신 체제는 유지되었다. 유신 헌법은 제4공화국의 통치 근간이었다. 정치적으로는 3권 분립이 무너지고 대통령 1인 중심 체제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국가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헌법이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시민들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유주의 사상을 무너뜨리고, 대통령 간선제와 국회 해산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무너뜨린 어처구니 없는 헌법이다. 최근 국가 권력이 군권을 이용해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문건이 공개되었다.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실제로 일어났다. 10월 유신은 자유를 빼앗아가는 헌법이었다. 이를 보면서 자유라는 위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에 위협을 가하는 세력들에게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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