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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을 무기로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감시와 탄압을 자행해 온 유신 체제가 10.26 사태로 끝나게 된다. 유신 체제에서 벗어난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민주화란 꽃길을 걸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기대감을 한순간에 앗아간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12.12. 군사반란이다.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대한민국은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져갔다. 국무총리였던 최규화가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박정희 암살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어 대통령 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0.26사건의 합동 수사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 역시 혼란스러운 정국의 주요 실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더군다나 박정희의 정보국 역할을 하던 경호실과 중장정보부의 차지철, 김재규가 동시에 힘을 못쓰게 되면서 정보활동은 보안사에서 독점하게 되었다.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실행하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했다. 그는 박정희 생전부터 군 권력을 장악하는 데 힘썻다. 군내 비밀 조직인 하나회 소속이었던 전두환은 하나회 소속에 있던 사람들을 군 주요 인사 곳곳에 배치시켰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조직을 통해 군내 많은 인사들을 자기 편에 두었다. 10.26으로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던 그는 좋은 기회를 잡게된다. 10.26 사태 수사 정보를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로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거나,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정승화 총창은 전두환이 점차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자 그를 견제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정보망을 장악한 전두환은 정승화의 계획을 쉽게 알아냈다. 대부분의 요직은 이미 하나회가 차지하고 있어 그들의 구분 조차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계획은 손쉽게 그의 귀에 들어왔다. 전두환은 자신이 수사 본부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게 된다. 실제로 김재규는 박정희를 암살한 이후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이동했다. 따라서, 이 점을 이용해 전두환은 곧바로 정승화를 공격했다. 그들은 12월 12일에 정승화 체포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주요 인사들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경비단에 집합하게 된다. 30경비단은 경북궁 옆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청와대와 매우 가까웠다. 더군다나 30경비단 단장은 장세동 대령이었는데, 장세동은 훗날 제5공화국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게 되는 인물이다.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 대령은 정승화 총장이 머물고 있던 관저에 찾아가 그를 강제로 서빙고로 끌고 갔다. 정승화가 전두환 일당에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게끔 손발을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이제 정승화 체포 수사에 대한 최규화 권한 대행의 결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최규화는 정승화 수사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의 진술 하나로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전두환 일당은 매우 당황했다.


 이렇게 된다면 이미 정승화를 구금한 전두환은 꼼짝없이 반란군이 되어 버리게 된다.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를 대통령의 승인 없이 구금해다면, 전두환은 자신의 직속 상관을 불법적으로 구금한 것이고 이는 명백한 반란이었다. 육군 참모총장 위에는 대통령 밖에 없기에, 직속 상관 체포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했다. 허삼수는 대통령 승인이 떨여졌다고 거짓말을 해가며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로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한다. 전두환은 친 정승화 계열에 있든 정병주 소장과 장태완 소장을 연회 초대를 빌미로 묶어둔다. 이들에 대한 감시를 위해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도 연회장에 보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전두환은 오지 않았다. 결국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을 들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곧바로 복귀한다. 당시 총성만으로 참모총장 공관에 공격을 가한 세력이 누군인지 알기는 매우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사 소속에서 정승화를 불법으로 데려갔다는 연락을 받게되었고,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했다.


 장태완 소장은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이 모여있다고 듣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직속 부하인 장세동 30경비단장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장태완은 장세동에게 전화를 했지만, 대신 전화를 받은 황영시와 유학성이 답하게 된다. 둘은 장태완 소장에게 화를 누그러뜨리고 우리랑 같이 얘기를 하며 정승화 총장의 체포를 이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장태완 소장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신들을 잡으러 갈꺼라고 한다. 이 전화 내용은 훗날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소개되었고, 인터넷 상에서도 매우 유명세를 타게 된다. 30경비단에 모였던 전두환 일당은 장태완 소장이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해야 했다. 우선 최규화가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장악했고, 지속적으로 최규화에게 정승화 체포에 대한 허가를 요구했다. 최규화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허가가 있지 않는 이상 그의 체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재현은 이미 집에서 도망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하나회측은 장관을 찾기위해 이곳 저곳을 수색했고, 육군 본부는 이들이 장관을 찾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태완 소장은 수도권이 충정부대의 병력 출동을 독촉하며 반란군 진압을 시도했다.


 전두환도 이대로 있으면 장태완 소장에 의해 반란이 진압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전두환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우선, 하나회에 소속된 군인사들의 주요 부대들을 장악했고, 노태우가 이끄는 9사단의 출동을 병력했다. 9사단은 우리나라 최전방에 위치한 예비사단이다. 대통령 사후 북한 군은 언제라도 남한에 병력을 보낼 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팽배한 시기 였다. 따라서, 전방 사단을 쉽게 반란에 동원하기에는 위험한 행위 였다. 장태완 소장 역시 “저놈들이 아무리 미치지 않고서야 전방 사단 병력까진 출동 시키기 않겠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노태우는 9사단 1개 연대를 무단으로 출동시킨다. 노태우는 반란 성공을 위해서 중요한 순간에 남침의 위험을 무릅쓰고 병력을 동원하게 된다. 전두환은 반란을 위해 최전방 사단까지 동원시켰다. 국가 혼란을 야기하고 한반도를 다시 한번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할 뻔한 심각한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후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지시로 9공수여단이 서울을 향해 출동했다는 급보가 전두환 일당에게 떨어지게 된다. 9공수여단은 인천에 위치하고 있었고, 1시간이면 서울에 진입이 가능했다. 반란군 축이었던 유학성과 황영시는 육군 본부에 전화를 걸어 우리도 더이상 무력 행사를 하지 않을 테니 9공수여단을 복귀 시키라는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 본부 측은 우리끼리 싸움이라도 나게 된다면 김일성이 남침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 협정에 대해 수락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게 된다. 결국 육군 본부 수뇌부는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협정에 대해 수락하게 된다. 결국 9공수여단은 부천 부근에서 회군하게 된다. 순진하게 전두환의 협정 제안을 수락하게 된 육군 본부 측은 어리석은 판단에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치르게 된다.


 곧바로 반란군 측은 국방부와 육군 본부를 장악한다. 장태완 소장을 비록한 몇몇 인원들이 끝까지 저항 해였으나, 이미 실제로 남은 병력은 하나회에 넘어갔다. 결국, 장태완 소장은 자신들의 부하인 수경사 헌병단에게 체포를 당하면서 수경사 전체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


 이 때,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동은 정말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멍청했다. 우선, 국방장관으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 하나회가 군 조직을 장악하는 행위를 전혀 견제하지 못했다. 또한, 정승환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어 있다면 군대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한 채 도망가 버려 나오지 않았다. 최규화 대통령이 노재현 국방 장관의 부재를 이유로 계속하여 정승화 체포 동의안의 승인을 거부했는데, 나오지 않을 거였으면 끝까지 숨어있던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 육군본부로 나와 다시 출근하고 결국 노재현은 하나회에 붙잡히게 되어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승인을 한다.

 

 정승화는 전두환 일당에게 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장에서 최하 계급인 이등병으로 17계급을 강등당했다. 이후 제5공화국이 끝난 이후에 간신히 복권하였다. 이외에도 반란군 진압에 앞장섰던 장태완 소장과 정병주 소장 역시 불명예 제대를 하며 군을 떠나게 된다. 이후 하나회 조직들은 더욱 군 주요 요직을 장악하게 된다. 미국 역시 이 정보를 듣고 막으려고 했으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쉽게 전두환 체제에 압력을 가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박정희와 지미 카터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믈,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 또한 없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전두환은 초고속으로 중장과 대장에 진급했고, 곧이어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군 조직을 장악한 전두환은 점점 권력의 중앙으로 이동하게 된다. 12.12 이후만 하더라도 국민들은 전두환이 대통령의 야심을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 시기가 왔고, 신군부의 군권 장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1980년 3월이 되어서야 군권 장악 소식이 국민들 귀에 들어갔고, 4월 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가 일어났다.


 전두환은 전방 사단 병력을 자신의 권력 장악에 이용했다. 그냥 김일성에게 나라 침입하라는 빌미를 제공하다 못해 국가를 바치는 정도에 미친 행위를 저질렀다. 허구헌날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며 언론에서 떠들어대면서 평화의 댐을 짓고, 언론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한 인물이었는데 참 앞뒤가 안맞는 일생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탱크를 몰고 광화문을 지나쳐 군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강직한 군인이었던 정병주, 장태완을 불명예 제대 시켰다. 사실 전두환의 야심, 정확하게는 하나회의 음모는 이전부터 군 내 수뇌부에서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 생전에는 대통령의 비호를 받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이해를 하겠지만,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이후 충분히 그들을 견제할만한 조치를 취할 시기는 충분히 되었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 본부로 향하면서 부터 정부와 군 주요 인사들의 실책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10월 26일부터 12월 12일까지 놀랍도록 주요 인사들이 실책들이 줄줄이 일어나며 전두환 앞에 자연스레 밥상이 차려지게 된다.


 정보력을 장악하여 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의 정치 감각은 분명 대단했다. 계급도 낮고 병력도 적었던 전두환이 육군 본부와 정부를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었던 최고의 원동력은 바로 정보력이었다. 보안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통해 군과 정부 사이의 여러 주요 정보를 미리 수집하여 대비책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늘 상대를 대결하기 위해서는 정보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다음 글 역시 제5공화국에 관한 글이기에 미리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5공화국은 이전에 박정희가 했던 방식을 많이 답습했다. 12.12 군사 반란은 이전에 일어난 5.16 군사 정변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갔다. 박정희가 실책했던 부분을 보완하면서 권력 장악 전략에 있어 세밀함을 더 해갔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역시 이전 정권처럼 국민들을 지독하게 탄압했다는 점도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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