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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ulee0220 2018. 1. 21. 12:06

1972년 6월 17일.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입주한 워터게이트 호텔에 괴한 5명이 침입했다. 그들은 민주당 회의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붙잡힌 이들은 자신들이 단순 절도범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몇가지 수상한 점이 있었다. 단순 절도범들에게 거물급 변호인이 등장했고 한 범인의 수첩에서는 백악관 보좌관 하워드 헌터의 전화번호가 나왔다. 수상한 정황들이 포착되자 결국 FBI가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선거전에서는 네거티브 전략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옳은 방식이 아닐지라도 네거티브의 효과는 이미 많은 선거전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 1972년 미국 대선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민주당의 선거 전략과 약점을 찾고 싶었다. 1960년 존.F.케네디에게 아주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상대후보의 약점을 찾아내는데 집착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민주당의 약점을 찾으려다가 결국 발각된 것이다.


하지만 워터게이트의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1972년 미국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닉슨이 승리한다. 닉슨 정부는 4년 동안 베트남 파병군 축소, 마약과의 전쟁 선포 등 국민들에게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 국정 운영에서 안정감을 느낀 미국 국민들은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선거인단 538표 중 520표를 쓸어담았으며, 국민들에게도 60%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인들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워터게이트가 닉슨 대통령의 후기 임기에 걸림돌이 될거라고 예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선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상원 청문회가 TV로 전국민에게 생중계가 되고 있을 때 어마어마한 폭로가 터지게 된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전 백악관 부보좌관 알렉산더 버터필드는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사건을 은폐조작하라는 지시가 담긴 녹음 테이프가 존재한다고 증언했다. 미국 전역이 뒤집혔다. 검찰은 즉시 닉슨에게 청와대 녹음 테이프를 증거 자료로 제출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닉슨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거절했다. 리처드 닉슨이 그동안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그에게 가지고 있던 단단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사건이 터졌을때 바로 닉슨이 미국인들에게 사과했으면 대충 넘어갔을 지도 모르던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게되는 사건으로 커지게 되었다.


 닉슨은 백악관 녹음테이프를 증거자료로 제출하라고 요구한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의 해임을 지시했다. 하지만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부 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러자 닉슨은 부장관이었던 윌리엄 러클하우스 권한대행에게 해임을 요구했으나 그 역시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결국 로버트 보크 송무차관이 콕스 검사를 해임하게 된다. 닉슨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였다. 이 사건을 토요일밤의 대학살이라고 불렀다. 닉슨 최대의 정치적 실책이었다.


 미국인들은 닉슨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정부 인사를 해임했다. 이제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 앞에서 한마디 말을 하게 되는데, 이 말로 인해 닉슨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 대중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기꾼이라는 오명만 쓰게 되었다. 닉슨은 그제서야 녹음 테이프를 증거자료로 제출했지만 대부분 내용이 삭제 된 채로 제출했다. 닉슨은 점점 탄핵의 길로 가고 있었다.


 미국 사법체계에서 위증은 용납되지 않는다. 심지어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계속 말바꾸는 행동을 보이자 미국민들은 그에게 크게 분노했다. 위증, 증거 은폐 그리고 조작. 닉슨은 미국의 사법 체계를 유린했다.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린 대통령에게 남은건 탄핵의 길이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 되기 직전 그는 사임했다. 미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임기 도중 하야한 대통령이다.


 닉슨은 승리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보여왔다. 1960년 미 대선까지 닉슨은 탄탄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 때 부통령을 역임하고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대중들에게 흙수저 출신의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었다. 그의 백악관 입성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에서 인생 최대의 라이벌은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존.F.케네디이다. 부자집 아들 출신의 민주당 후보인 케네디는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할줄 알았다. 그는 TV토론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범생이 느낌의 닉슨보다 부자집 도련님 케네디에 끌린것이다. 결국 닉슨은 케네디한테 아슬아슬한 표차이로 패배해 낙선하였다.


 이 패배가 닉슨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던 듯하다. 정치 경력도 훨씬 짧고, 정책 이해도도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후보에게 패배를 겪은 그였기에, 8년 동안 슬럼프를 겪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뀐듯하다. 정직한 방법으로만 가지고선 상대 후보를 이기기 쉽지 않다는 것도 배운듯 하다. 8년뒤 백악관에 멋지게 입성할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역량을 의심하는 국민들은 거의 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승리를 위해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고 백악관에서 쫒겨났다. 닉슨은 죽기 직전까지도 워터게이트 사건을 승복하지 않았고, 대통령이 하는 일은 불법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하는듯 굉장히 승부 지향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닉슨에게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승리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모든 사람들은 패배를 두려워한다. 전쟁에서 지더라도 명예롭게 패배를 맞이할 것인가, 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얻어낼 것인가.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추악한 승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이득으로 승리의 보상을 얻을지라도 명예는 얻을 수 없다. 주변에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또한, 보상까지도 닉슨처럼 다시 반납해야 할지도 모른다. 추악한 승리를 갈구하는 자들이 현대 사회에서 많아 보인다.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는 것은 그저 남을 떨어뜨리는 일이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절대 아니다. 멋지게 승리하자.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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