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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우리나라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다. 전임 대통령의 실정으로 인한 탄핵이후 치뤄진 대선이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선출직이다. 반면 조선시대 국왕은 아버지나 가까운 친인척에게서 상속 받는 직책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온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상속받는 국왕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될 것 같지만,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는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조선 국왕의 능력치는 매우 높다. 우리나라 고대, 중세는 물론 전세계 왕조를 둘러봐도 조선 국왕들의 능력은 매우 뛰어난 축에 속한다. 역사에 남을 만한 폭군과 암군도 존재 했지만, 대부분 국왕들은 평균 이상의 능력으로 업무를 수행해냈다. 이러한 배경에는 세자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실시된 교육과정과 조선왕조실록의 존재라고 생각된다. 조선의 세자 교육은 다른 문화권의 국가들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 실록의 존재로 조선 국왕은 행동 거지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국왕들을 대상으로 현대적 리더 조건에 대입시켜 보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들이 지금 대한민국이나 다른 나라의 대통령 혹은 수상직책에 있거나 혹은 일반 회사에서 CEO나 부서장의 직위라면 어떤 리더로 일했을지 한번 주관적으로 추측해보았다. 실록이나 사서에 기록된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은 어떤 리더의 유형이었고, 몇점짜리 리더 였는지 살펴보도록하자. 참고로 재위 기간이 너무 짧거나 자신만의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국왕들은 제외했다. 대상이 되는 군주는 27명의 조선 국왕 중 21명이다. 그리고 아래 6가지 관점으로 조선 국왕의 점수를 매겼다.


  1. 소통능력

 리더의 첫번째 평가 지표는 소통능력이다. 정도전이 꿈꾸던 조선 국왕의 제 1덕목도 아마 소통일 것이다. 리더의 카리스마도 중요하지만 팀원들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슈에 대해 각 팀원들의 요구 사항이 적절히 반영되었는가, 신하들과의 대화 시도를 충분히 진행 했는가 또한 신하들에게 국가 운영의 동기 부여를 제공 했는가를 이 부분으로 평가 해볼 것이다.


2. 결단력

 리더는 우유부단해서 안된다. 아무리 좋은 기획력과 소통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시행 과정이 없다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리더의 선택 장애로 시기를 놓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리더가 시대 진보적 정책을 기획하고 시기 적절하게 시행 했는가 살펴보자. 그리고 정책의 논공행상이 잘 이루어져, 국가를 위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상을 부여하고 국익에 해를 가한 자를 법에 맞게 처벌 했는지 알아보자.


3. 도덕성

 유교 국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조선 만큼은 아니지만 리더가 지니고 있어야할 주요 덕목이다. 대통령이나 CEO라면 더욱 그렇다. 비록 현대 리더의 최우선 가치는 아니지만 도덕성이 없는 리더를 팀원들은 잘 따르지 않는다. 대한민국 전임 대통령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덕성은 중요한 지표다. 리더나 리더의 친인척이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리더가 되는 과정에서 불법적 과정은 없었는지 살펴보자. 주요 신하들의 비리, 범죄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이 부분에 포함된다.


4. 일관성

 리더는 일관적이어야 한다. 변덕이 심한 리더는 팀원에게 피로감을 준다. 결단성이 정책 시행에 대한 평가라면 일관성은 시행 과정에 대한 평가이다. 국정 운영에 있어 일관성 있게 자신의 기조를 유지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5. 열정

 리더는 열정적이어야한다. 리더가 업무에 관심이 없고 다른 취미에 큰 관심이 있다면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선출직과 상속직이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직책을 얻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분명 열정이 뛰어날 것이다. 조선 국왕에 빗대자면 얼마나 애민 정신을 바탕으로 국정 운영을 수행해 나갔는지, 국정을 멀리하며 주색에 빠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자.


6. 결과

 리더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성과를 내야 진정한 리더다. 앞의 과정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성과가 없으면 실패한 조직이다. 살펴볼 국왕이 사회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고, 후대 혹은 현대 사회에 어떤 이점을 남겼는지 평가 한다. 이 성과는 외교, 경제, 사회 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태조>

Preview. 조선의 창업군주 태조 이성계이다. 고려말 권문세족의 부정부패, 외척의 침입, 민란 들을 수습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킨 군주다. 이성계가 없었다면 지금 모습의 대한민국이 존재 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무려 중국, 일본 이후엔 러시아, 미국 등 열강 사이에서도 꿋꿋이 500년간 나라를 지킨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태조 이성게를 논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정도전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정말 많은 일을 맡겼다. 조선의 설계를 그에게 위임했다. 이성계는 자신의 장기인 군대 통솔 등 외부적 업무를 맡았고 내치는 정도전에게 맡겼다. 투박해보이는 이미지와 신하들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휘어잡았다. 정몽주를 끝까지 포용하려 한 점 등 이성계의 소통능력은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

이성계는 압록강에서 위화도 회군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들 이방원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승산이 없는 전투에 백성들의 목숨을 걸지 않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결단을 내려 조선을 건국한다. 좀만 늦었더라도 우왕과 최영 장군의 세력에 의해 축출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이성계의 결단력으로 정도전, 조준 등 급진 성향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따르게 만들었다.

다만 이성계는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던 태자 책봉과 왕씨 왕족에 대한 탄압 부분은 아쉬움이 따른다. 왕씨 탄압이야 역성 혁명의 필연적 요소 라는 점에서 변명거리라도 있지만, 태자 책봉은 분명 이성계의 실책이다.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한 왕자인 이방원에게 역차별을 주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왕씨 탄압 역시 이 과정이 최선책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는 부하들에게 혼란을 줄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에 있어 필요한 일처리를 정도전에게 위임하고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도전을 신뢰했다. 결국 그 신뢰가 독이 되어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었지만 시행된 정책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Overview. 이성계는 조선 건국을 이뤄 내고 명나라의 협조를 끌어내는 능력을 발휘 했다. 정책 결과와 결단력에선 나쁜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듯 하다. 그리고 그의 최고의 장점은 일관성. 신하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다. 정도전에게 국가 설계를 맡기고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이성계의 지원을 받은 정도전은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 했다. 도덕성에서만 살짝 낮은 점수를 부여했고, 이외엔 전반적으로 고득점을 줬다. 현대에서도 충분히 고평가를 받을 만한 군주이다.


소통능력 B+

결단성 A+

도덕성 B

일관성 A+

열정 B+

결과 A


<태종>

Preview.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왕이다. 2대 정종은 재임 기간도 짧았고 이방원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잠시 왕위를 맡은 케이스라 평가에서 제외했다. 이방원은 왕권 강화를 꽤했다는 점에서 시대 역행적 면모도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의 업적들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조선시대 왕족들이 본인이 원하거나 혹은 타의에 의해 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오르는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 첫 군주이다.


이방원은 조선 역대 왕들중 유일하게 과거 시험을 통과했다. 고려 말부터 정계에 진출해 정치 경험에 있어 결코 일반 신하에 뒤지지 않았다. 그는 고단수 정치가였다. 신하들을 자신에 손아귀 안에 쥐고있었다. 리더의 풍부한 경험은 조직을 좋은 쪽으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실시했다. 6조의 부서장 격인 판서가 직접 왕과 정책을 논의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신하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한 시책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태종은 이 시책을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사용했다. 6조 직계제를 실시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의정부의 3정승 권한은 줄어들게 된다. 그는 신하 중심의 정치보다는 왕권 강화와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데 주력한 왕이다.

왕위를 찬탈한 다른 왕들과 달리 이방원은 공신을 배척했다.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을 한 공신을 배척하지 못했다. 공신들을 배척하게 되면 신하들은 왕을 위해 열심히 일해도 자신에게 오는 보상이 적을거라고 생각되고 이는 충성도로 직결된다. 반대로 그들을 견제하지 못한다면 공신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져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세조와 중종이 이 과정에서 매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떠올리면 공신에 대한 처분은 매우 중요하다. 태종은 공신들을 적절히 숙청해내가며 자신의 왕권을 강화했다. 태종은 우유부단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의 결단력 만큼은 정말 대단했다.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과 자신의 동생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모였던 신덕왕후의 묘를 서울 도성 밖으로 옮길 정도로 둘 사이는 좋지 못했다. 또한, 그의 정책 기조는 일정했다. 왕권 강화라는 큰 틀에 맞춰 사병을 혁파하여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자신이 사병을 이용하여 왕권을 찬탈하였듯이 사병은 왕권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라는 점을 잘 알고있었다. 태종의 일관적 정책은 조선 왕조에 큰 역할이 되었다.


Overview. 결과적으로 태종은 왕위 찬탈을 위해 동생들을 죽이는 과오는 저질렀지만, 조선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왕자이자 왕이었다. 공신에 대한 처우도 다른 왕들과 다르게 철저했다. 그는 그리고 능력위주로 정치를 실시 했다. 비슷한 유형의 미국 대통령이라면 토머스 제퍼슨이 떠오른다. 둘다 국가 초기에 리더로 선정 된점 그리고 향후 국가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주력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었으나 분명 뛰어난 리더 였고, 신하들을 카리스마로 휘어 잡았던 군주이다. 현대에 더욱 각광받을 스타일의 군주다. 그러니 높은 점수가 나올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소통능력 A

결단성 A+

도덕성 C

일관성 A

열정 B+

결과 B+


<세종>

Preview. 조선인들, 나아가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명군 세종이다. 모두 아시다시피 세종 역시 적장자가 아니었다. 본래 왕세자는 양녕대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면모를 보여 동생이었던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가 바로 조선의 4대왕 세종이다.


리더가 부하 직원이나 팀원들과 소통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있다. 팀원들에게 직접 비전을 제시하게 하는 리더도 있고 반대로 자신이 직접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세종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는 비전을 제시했고 신하들은 이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했다. 황희 정승, 장영실, 그리고 집현전 신하들이 이런 방식으로 일을 했다. 세종과 같이 일했던 이들은 상사의 힘든 요구에 불평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한 말이었던 “신하들이 고생해야 백성이 편하다.”에서 그의 리더 가치관을 알 수 있다. 왕과 신하라는 완벽한 상하관계가 있기때문에 가능한 구조다. 현대 CEO가 그랬다가는 열정페이 요구, 끝없는 야근 강요 등으로 자주 부서원 들에게 뒷담화를 당하거나 진작에 고용노동부에 고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세적 소통능력으론 최고, 현대적 소통능력은 물음표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세종대왕의 능력이었다면 분명 큰 성과를 내 CEO로 부터 큰 사랑을 받았겠지만 부하직원들의 뒷담화를 꽤나 많이 먹지 않았을까 예상된다.

워낙 아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것도 많은 세종은 시도도 참 많이 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물론 이종무에게 대마도 정벌을 지시했고, 김종서에는 국경지대에 4군 6진 건설도 지시했다. 농업, 상업, 과학, 예체능 전분야에서 발전이 있었다. 경연을 실시해 유교를 발전시켰다. 이성계 부터 세종까지 3대에 걸쳐 참 대단한 결단력을 가진 군주들이 탄생했다. 보면 볼수록 신하들이 피곤했을듯 하다.

세종 치세에 노비 종모법과 고려 왕씨 학살이 지속되었지만 이를 세종의 도덕성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좀 가혹하다. 조선 건국 이후부터 꾸준히 실시되던것을 세종때까지 유지 된 것이다. 오히려 능력은 있었으나 금품 수수 등 도덕적 문제가 있던 신하들을 비호 한쪽이 도덕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세종대왕에 대해 약간의 비판을 했지만 이 점들을 다 뒤엎고 그가 성군이 된 이유는 바로 애민정신이다. 앞서 말한 약간의 단점들을 가리기에 충분하다. 그가 부하의 관점 봤을때 리더로서 아쉬운거지 그는 분명 성과를 내는 리더다. 국왕이 반드시 지녀야할 가치관인 애민 정신을 바탕으로 정책을 기획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라는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아무리 천재여도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 정치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가 한국사 이래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의 일관성, 열정, 능력 세 부분 모두 뛰어난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Overview. 워라벨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현대 회사 분위기에서 보자면 세종의 모습은 분명 아쉽다. 그래도 세종의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조선이 초기에 크게 발전하는데는 그의 노력이 정말 큰 몫을 했다. 로마제국의 팍스 로마나, 청나라의 강희제-옹정제-건륭제에 비견 될 만큼 태조-태종-세종시기는 ‘팍스 조서니아’라고 불려도될 황금기였다. 능력에 있어서 만큼은 정말 한국 역사를 뒤바꿔 놓을 최고의 군주 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역시 그 바탕은 세종의 애민정신에 있다.


소통능력 B

결단성 B+

도덕성 A

일관성 A+

열정 A+

결과 A+


 

<문종>

Preview.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2년 2개월로 짧으나 세종 말기 부터 무려 7년 이상 대리청정을 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라서 평가에서 뺄 수 없었다. 정조-효명세자와 더불어 능력을 뛰어났지만 요절했던 군주 중 한명이다.   


문종의 소통능력을 참 평가하기기 애매하다. 문종은 사료가 많이 부족하다. 아마 대소신료들과의 일처리 방식은 아버지 세종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문종을 따랐던 이들은 수양대군에 붙어 아들을 잘 보필해달라고 부탁했던 문종을 배신하거나, 끝까지 그의 아들을 보필하다 수양대군에게 죽었다. 전자에 해당되는 인물이 신숙주와 한명회 같은 인물들이고,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은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사육신들이 해당될 것이다. 다만, 문종이 수양대군의 야심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으로 비판하기엔 너무 과한 측면이 있다. 수양대군은 문종과의 우애는 다른 형제들 만큼이나 두터웠고, 그가 본격적으로 왕위 찬탈을 마음 먹은 것도 문종 사후일 가능성이 크다. 김종서 등 많은 신하들이 문종을 따랐다는 점에서는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 신숙주와 한명회의 변절은 문종의 문제라기 보다는 둘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문종은 사극에서 나온 병약한 이미지와 달리 강인한 군주였다. 체격도 장대하고 미남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는 덩치가 크고 활발한 공대생 이미지이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과학형 군주다. 문종실록에 기록된 신숙주와의 대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방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신이 직접 병기를 제작하는데 참여 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신숙주와 논쟁을 빚었다. 문종은 직접 일처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리더 스타일이라고 보여진다. 아버지를 닮은 열정적 리더였다. 문종은 조선 최초의 적장자 아들이다. 그리고 수양, 안평대군과 같은 동생들을 잘 아꼈다. 오히려 너무 잘해줘 나중엔 큰 화로 이어졌다.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겨 신하들이 그에게 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도 문종은 끝까지 동생을 비호했다.
그의 문제는 결과다. 그는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 세종 만큼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건강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항상 그는 플랜b에 대한 수립이 아쉬웠다. 문종은 3명의 마누라를 두었으나 몇몇은 도덕적 문제로 궁에서 쫓겨나고, 단종을 낳은 세자빈은 아이를 낳은 직후 사망했다. 그래서 단종은 유일하게 조선 왕들 중 왕비를 두지 않았다. 어린 단종은 즉위한 이후 왕실의 어르신이 없어 대리청청을 할 사람이 없었다. 왕실내에 단종을 지켜줄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이는 결국 계유정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Overview. 태종의 카리스마, 세종의 천재성에는 못미치지만 전반전인 그의 능력은 모두 평균이상이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건 건강 문제였다. 충분히 명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문종의 단점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만 너무 치중한 측면이 있다. 세종도 살아있을때 지적한 부분이지만 왕실에서 왕후의 유무는 정말 중요하다. 왕후을 두지 않은 안일한 일처리는 분명 문종의 실책이다. 또한 국방과 과학에만 너무 관심이 있던 나머지 내치에는 소홀했다. 신숙주가 지적했든 리더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만 몰두해서는 안된다.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신하들간의 의견을 조율해야한다. 물론 그의 역할로 15세기에는 별다른 이민족의 침입 없이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16세기에 큰일이 터져서 문제지


소통능력 B

결단성 C+

도덕성 A

일관성 B+

열정 A

결과 D


<세조>

Preview. 조선의 7대왕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6대왕 단종의 경우 즉위 당시 겨우 12살이었고, 재임 기간도 3년 밖에 되지 않아서 제외했다. 별다른 정치적 행보가 없었다. 짧았던 재임기간과 다르게 그는 조선 국왕 중 최고의 정통성을 타고났다.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적장자이고 원손-세손-세자-왕의 순서로 즉위했다. 조선 역사상 유일할 뿐만 아니라 전세계 역사 중에서도 몇 안되는 케이스다.
정통성이 부족한 세조는 계유정란이라는 반정을 통해 왕위를 찬탈했다. 이점에서 태종과 많이 비교되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다. 물론 왕권을 불법적으로 찬탈한점은 같기는 하나, 태종은 형이 동생을 죽인거고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태종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뜬금없게 장남도 아닌 어린 동생을 세자로 삼아 그들을 몰아냈다. 정통성으로 우위가 있던 조카를 몰아낸 왕위 강탈 행위다. 세조를 기점으로 조선 사회의 방향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게 된다.  


세조는 세종대에 실시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6조 직계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태종대에도 언급했던대로 6조 직계제는 3정승의 권한을 제재하는 주요 왕권 강화 수단이다. 게다가 경연을 폐지하였다. 왕과 신하간의 소통의 장인 경연을 폐지해 소통 단절시켰다. 유교국가의 군주가 동생과 조카를 죽이고 자신의 왕권을 강탈했다는 점은 세조 최고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갖은 잔소리와 비판을 두려워했다.
조선 전기 왕들의 특징은 대체로 결단력이 좋다. 일 처리는 정말 화끈하게 잘 한다. 세조 역시 이성계의 열정과 카리스마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하다. 그나마 세조가 좋게 평가되는 부분이 이점이다. 자신이 직접 찬탈하여 왕이 된 만큼 열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그는 후궁도 멀리하고 술은 좋아했으나 검소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민생에 대한 관심도 있어서 세종대의 악법중 하나였던 수령 고소 금지법을 폐지 하는 등의 성과도 분명 존재한다. 이런 점들로 보아 분명 정치 개념도 어느정도 차있던 군주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연산군과 같은 다른 폭군과 같은 레벨로 세조를 놓지 않는 이유다.
여러 면에서 태종과 정책적 기조가 유사해보이지만 방향성은 다르다. 태종의 경우 신권을 존중하며 왕권이 이를 견제하는 목표의 왕권 강화였다면, 세조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전제 왕권을 위한 통치였다. 태종은 경연도 비교적 꾸준히 열었으며 신하들에게 정치 참여를 많이 유도했다. 또한 공신을 배척해 한 세력이 너무 비대하게 커지는 것을 막았다. 반면, 세조는 공신을 끝까지 감쌌다. 결국 공신들에 의해 조정이 장악되었고, 이들이 바로 훈구파로 불리는 세력이다. 성종부터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훈구 세력은 4번의 사화를 일으켜 조정에 피바람을 불게 했다.   


Overview. 세조에 대해 총평을 내리자면 화끈했던 성격 만큼이나 과오가 명백했다.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한 점과 친백성정책도 어느정도 펼쳤다. 하지만 유교국가 조선의 군주로선 여러면에서 부적합했다. 조카와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여가며 철권통치를 이뤘다. 비슷한 우리나라 현대 정치인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세조는 계유정난이라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리더에 올랐다. 화끈한 결단력 그리고 철권통치를 실시 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국가 발전을 이끈 정책을 이뤄냈다는 점도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둘의 정통성은 끝까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박정희 정권은 부마시위, 세조 정권 말기엔 이시백의 난과 같이 말년에 자신의 권력에 도전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소통능력 D

결단성 A

도덕성 F

일관성 C+

열정 B+

결과 C


 

<성종>

Preview. 조선의 8대왕 예종은 2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급사했다. 그래서 정해진 후사가 없었고, 신숙주와 한명회는 급하게 의논해 세조의 손자였던 성종을 왕위에 올렸다. 조선의 9대왕 성종도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었다. 즉위 당시 13세였던 그는 어린나이에 즉위하자마자 세조비였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성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만드는데 노력했다. 홍문관을 설치해 이전에 집현전 역할을 한 부서를 부활시켜 신하들의 정책 참여를 유도 했다. 예종 이후부터 수렴청정 기간동안 왕권을 크게 약화되었다. 한명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를 견제하는것이 성종의 첫 정책이었다. 그는 대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간을 활성화 시키고 해당 기구에 사림파를 대거 배치하였다. 할아버지 세조가 자신의 견제세력을 숙청을 하여 왕권을 강화한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가 조선 성군 중 한명으로 인정하는데에는 이런 면이 큰 역할을 했다. 전근대 군주들이 신하들이 반발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폭력으로 제압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으로 볼때 성종의 소통 정치에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성종의 말기에는 대간의 세력이 너무 커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닌 비판을 위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건강하지 못한 비난은 결국 분쟁의 씨앗이 되어 사화로 이어지게 된다. 성종도 이를 뒤늦게 눈치 채 칼을 들었으나 얼마 가지못해 죽었다. 물론 이부분의 잘못의 1순위는 다음왕인 연산군 실책이다.
성종은 유교적 왕이었다. 예절과 도덕을 중시했다. 심지어 유교의 구시대적 면모 까지 중시했다. 여성에게 정절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열녀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데에도 주력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물론, 이 실책은 현대적 관점으로 본것이다.
소통을 강조하는 리더들이 범하는 실책 중 하나가 아쉬운 결단력을 보인다. 아쉽게도 성종역시 이런 모습을 보였다. 성종 말기 상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대소 신료들을 용서했다. 성종대가 아니었다면 살아남기힘든 수준의 상소와 간언들이 오갔다.   


Overview. 몇가지 문제는 존재하지만 성종은 분명 능력이 있었다. 지나치게 소통만 강조하고, 문에만 너무 치우쳐 무를 저버린 측면이 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한다면 충분히 뛰어난 활동을 펼쳤다. 세조-예종기간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세조 때 무너진 사회 시스템의 많은 부분을 복구하고 더욱 발전시켰다. 경국대전 편찬은 그의 최고 성과이다.
성종도 38이라는 젊은나이에 죽었다. 그래도 13세에 왕위에 오르고 20세부터 정치를 시작했기에 꽤 오랜 기간 재임했다. 전근대 군주와 다르게 소통을 강조하고 유배와 숙청을 최소화 한점에선 정말 진보적이지만, 유교 사상을 너무 숭배해 여성 차별을 권장한 부분은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는 16세기 유교사회이다. 이런점을 감안하여 보자면 그는 현대에서도 각광받을 군주다. 다만 너무 소통해만 치우쳐 ceo로서는 최고일지라도 부서장으로서는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부서원들의 의견은 참 잘 모아도 항상 칭찬만하고 발전은 없는 사람만 좋은 리더의 면모도 보여준다.


소통능력 A+

결단성 C

도덕성 B+

일관성 B

열정 A

결과 A


 

<연산군>

Preview. 한국사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이다. 그는 단종 이후 오랜만에 적장자로 즉위한 왕이다. 그의 폭정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정통성이다. 모두가 예상했듯이 그는 중세, 근대적으로 보나 현대적으로 보나 분명 박한 평가를 받을 리더 임은 분명하다. 그의 재임 기간에 2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수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우리 사회에선 항상 반면교사가 필요하다. 사회에 나가서 절대로 연산군과 같은 리더가 되면 안된다.

현대에 와서 연산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 국민들이 알듯이 그의 재임 초기 10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므로 중종 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은 연산군을 최대한 나쁘게 그려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했다는 점도 감안해야한다. 따라서 세자시절 사슴을 죽인 일화나, 세자 시절의 몇몇 야사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 들이면 곤란하다.


조선 왕들의 소통 능력을 알아보는 척도로 활용되는 경연을 연산군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다만 이걸로 불통의 왕이라고 보기는 어려운게 경연을 싫어한 왕들은 많았다. 태조 이성계, 태종, 세조 모두 경연에 나가는 것을 불편해했다. 경연은 실무와 관련이 없는 유교 토론의 장이다.

성종 말기부터 시작된 대간의 도를 넘는 권력 행사는 분명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연산군도 이점을 느꼈고, 그들을 견제할 명분을 찾아 많은 대간의 사림파들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다. 전근대적 관점으로 봤을 때 연산군의 무오사화 행보는 그리 비난을 받을 만한 행보는 아니다. 아버지 성종과 아들 연산군의 일 처리 방법의 차이지, 이 정도 규모의 숙청은 어느 시기에나 일어날 법한 수준이었다. 물론, 현대적 관점으로 봤을 때 연산군의 일 처리 과정은 소통능력도 꽝이고, 도덕성도 낙제점이다. 결단력에서는 그나마 좋은 점수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연산군은 예술가적 기질이 짙은 왕이기도 하다. 음주가무를 즐기고 여색을 밝히는 것은 아버지 성종을 꼭 닮았다. 다만 성종은 절제 하는 선을 잘 지키며 국가 운영에도 충실해 조선 역사에 큰 획을 남겼다. 연산군도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 지켰으나 점차 국정을 손에서 놓게 된다. 그러던 와중 발생한 사건이 바로 갑자사화이다.

많은 드라마에서 연산군이 우연히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되고 순간 빡쳐서 많은 사람을 학살 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상은 다르다. 연산군도 세자 시절 어린나이긴 했지만 궁 안에서 같이 생활 했으니 폐비 윤씨에 대한 실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에 공을 세운 주요 훈구파와 사림파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연산군은 이전 부터 전제 왕권을 구축하고자 하는 야욕을 보였다. 임사홍의 집에 들려 폐비윤씨의 이야기를 듣고 성종의 후궁 2명을 살해한 것은 그저 명분이다. 연산군은 이후 수많은 훈구파와 사림파를 제거했다.

조정에는 신하가 남아나질 못했다. 그의 주위엔 아첨쟁이들 밖에 남지 않았다.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면 사형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연산군은 그렇게 전제왕권을 구축했다. 그는 국정에서 손을 떼고 매일 술을 마시고 수많은 후궁, 기생들과 놀기 시작한다. 그의 머리 속에 민생이라는 단어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조선은 성종 시기까지 가지고 있었던 건강함을 완전히 잃었다.


Overview. 연산군에 대해 최종 평가를 내리자면 결국 그가 노력했던 전제왕권을 만들려는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뒤에 즉위한 왕들의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왕들이 조금만 권력을 휘두르면 신하들은 “연산군과 같은 왕이 되려 하십니까?”라고 간언을 시작하게 되고 왕들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된다.


소통능력 F

결단성 C

도덕성 D

일관성 D+

열정 F

결과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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