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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숙종은 조선에서 몇 안되는 적장자 임금이다. 그리고 그 중 더 몇 안되게 자신의 재임 기간 내내 권력 마음대로 다 휘두르고 죽은 2명 중 한명이다. 다른 한명은 당연히 연산군. 오랜만에 정통성이 갖춰진 왕이 나오게 되다보니 많은 신하들이 왕이 권력을 맘대로 휘두를까 우려했고, 그 우려는 100% 적중했다. 유럽의 절대 왕권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조선의 절대 왕권 시기가 있었다면 바로 이 숙종 시기이다.
무려 환국만 4번이 일어날 정도로 숙종 시기는 혼란기였다. 예송논쟁까지만 하더라도 붕당정치는 좋은 면도 분명 존재했다. 가끔 많은 신하들이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당시는 인권 개념이 약한 조선시대 였다. 특히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예송논쟁은 국가의 방향성을 논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숙종 시기의 환국을 거치게 되면서 점차 변질되게 된다. 말그대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비판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반대파를 무조건 사문난적으로 몰아가고, 서로 모함을 하면서 상대방을 공격하게된다. 이후 나올 왕들을 이야기는 망가진 조선의 본격적 멸망 행보가 시작되는 시기다.
  예송논쟁 이후 권력은 잡은 남인과 현종은 본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현종이 급사하게 되어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신하들에게 자주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자신은 그렇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다. 숙종은 14살에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만 수렴청정없이 바로 실권을 휘두르게 된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한 정통성 덕분이었다. 당시 남인 중 권력을 잡고 있었던 대표적 인물은 윤휴와 허적. 당시 절치 부심하고 있던 서인과 신하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숙종의 생각이 잘 맞아 떨어져 사소한 이유로 윤휴와 남인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송시열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남인의 아이콘이었던 윤휴는 그렇게 죽게 되었고, 이 사건이 바로 숙종 시대 첫번째 환국인 경신 환국이다.
  숙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장희빈 아들의 원호를 문제 삼아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을 축출하게 되는데 이것이 두번째 환국인 기사 환국이다. 다시 남인이 권력을 잡는가 싶었지만, 숙종은 다시 남인을 축출하게 되는 환국을 연쇄적으로 일으킨다.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 남인들은 다시 권력에 중심에 서지 못한다. 남인들은 재야로 쫒겨나 실학자가 되거나 지방 관리가 되고, 이들 중 일부는 훗날 개화파가 되어 조선 말기에 조선 개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 남인 처리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고, 강경파가 노론, 온건파가 소론이 된다. 우리가 드라마로 많이 접하게 된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건도 당파 싸움과 관련이 매우 크다. 남인은 숙종이 장희빈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그의 아들인 경종을 왕위로 올리려 했고, 서인 측은 인현왕후를 지지했다. 그리고 서인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왕위로 올리고 싶어했다. 참고로 연잉군의 어머니는 동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숙빈 최씨이다.
숙종의 치적이라면 대동법을 드디어 전국적으로 시행되게 했다는 점과 국방력 강화이다. 대동법 시행은 숙종의 치적으로 돌리기에는 이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기 때문에 그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국방력 강화 역시 효종 때부터 줄곳 주장되어 오던 점이다. 숙종시기는 청과 서구 문물이 차츰 들어오는 중요한 시기 였다. 주변국인 일본은 혼란을 넘긴 에도 막부가 점차 호황기를 맞이해가고 있었고, 청나라는 강희제라는 중국 역사상 위대한 군주 중 한명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즉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숙종은 붕당 정치에만 신경쓰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왕이었다. 민생과 국력을 고민해야할 시기에 숙종은 그저 궁궐 내 권력 싸움에 집중했다.
숙종은 붕당 정치를 변질시켰고, 정치 시스템을 세번의 환국으로 무너뜨렸다. 자신과 조금만 생각이 다른 유학자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축출시켰다. 숙종은 말년에 노론을 지지하며 결국 영조 대 이후로 노론 위주의 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궐내 권력 싸움에 만 너무 치중한 국왕이었다. 자신의 정통성도 있었고, 왕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파악하고 있던 군주지만 힘의 배분을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소통능력 D
결단력 A
도덕성 C
일관성 F
열정 B
결과 D



<영조>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었던 경종이 이른나이에 죽고, 숙종이 총애하고 노론이 밀어준 경종의 동생 연잉군이 다음 왕위에 즉위하게 되고, 그가 바로 영조다. 영조가 재임했을 당시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버지 숙종과 형 경종 때 갖은 환국과 옥사로 조정은 이미 난리가 났고, 세제 시절의 영조가 처방한 약을 먹던 도중 경종이 죽게 되어 영조는 항상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다. 초기 그는 매우 불안한 상태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종이 죽자 곧바로 세력이 약해진 소론 일부는 이인좌를 필두로 난을 일으켰다. 
  영조는 임기 내내 온건파들을 중용했다. 그는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고 온화하고 얌전한 신하 위주로 등용하는 탕평책을 제시했다. 영조는 아버지 경종과 어머니 숙빈 최씨의 정치적 면모를 쏙 닮았던 정치 고수였다. 비록 노론에 의해 즉위할 수 있던 영조였지만, 그는 노론에게 끌려다니지 않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대표적으로 말 안듣던 노론 세력을 정리한 사건이 정미 환국이다. 그래서 그는 온건 탕평책을 실시한 이유도 신하들과의 파워게임에서 지지 않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숙종으로부터 이어받은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척신 정치를 시작했다. 노론 중 명망이 높은 여러 대신들을 멀리하고 별볼일 없던 집안이었던 풍산 홍씨를 정치 파트너로 삼았다. 그렇게 새로 노론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바로 홍봉한과 홍인한. 그리고 홍봉한의 딸을 자신의 맏 아들인 사도세자와 결혼을 시키는데 그가 바로 혜경궁 홍씨. 영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완전히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방지했다. 하지만 영조의 이런 바램과 달리 조선 정치는 계속 피폐해져만 갔다. 온건 탕평으로 표면적으로 노론과 소론이 공존 해보인듯 했으나, 정작 조정에서 백성을 위해 일할 인재들을 전부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일부만 남아 그저 영조의 눈치만 보게 되었다. 온건책이라는 말이 나쁘게 말하면 결국 줏대없이 자신의 말만 듣는 사람들을 뽑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던 와중 조선 후기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8일동안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임오화변이라고도 하는 유명한 사건이다. 사도세자는 숙종과 비슷하게 왕위 경쟁자가 없어 정통성이 매우 뛰어났다. 장자는 아니었지만 효장세자는 이미 일찍 죽었고 더군다나 그는 서자였다. 거의 적장자나 다름 없는 위치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참 아이러니 한 것이 그의 발목을 오히려 이런 정통성이 발목잡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야 되는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영조는 그를 강하게 키우길 원했다. 더군다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첨예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영조는 신하들을 학문적 식견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왕이 필요했다고 생각하고, 사도에게 계속 유학 공부를 시켰지만 안타깝게도 사도는 정반대 성향을 타고 났다. 영조는 사도의 행동 하나하나 코치해가며 그를 강하게 키웠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사도는 그런 아버지와 자주 충돌하게 되고, 결국 끔찍한 결과를 나았다.
  왕과 아들간의 권력 싸움으로 대립을 한 케이스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교육적인 문제로 인해 더군다나 아들을 직접 죽인 경우는 없었기에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 영조는 정말 최악의 군주였다. 유교 국가에서 유교적이지 못했던 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이부분이다. 다행히 그의 손자였던, 세손 이성이 영조가 원했던 이상적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 부분도 세손이 영리해서 영조가 원하는 모습으로 잘 맞췄다는 평가도 많이 있다.
  그래도 영조가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그의 절약정신이다. 조선 역대 왕들중 가상 수라상이 초라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훌륭한 군주였다. 대외적으로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조선 초기부터 문제를 일으킨 3대 납세 악법이 제도적으로는 모두 해결되었던 시기가 바로 영조시기이다. 그리고, 영조는 압슬형이나 낙형과 같은 참혹한 형벌을 없애며 인권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가져왔다. 사대부들이 세금을 면제 받는 용도로 안좋게 쓰인 서원을 더이상 짓지 못하게 하며 국가 재정도 늘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금주령을 실시해 백성들의 사치를 막게 했다. 본은이 나서서 검소한 모습을 보이고 백성에게 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기를 주도한 매우 모범적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영정시대에 사회상이 많이 바뀌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런 점들이 큰 역할을 했다. 내치 따위는 신경도 안쓴 숙종과는 많이 상반된 모습. 조선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 시기였다.
  궁궐 내 신하들에게는 정치 고단수의 모습을, 자식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부모였지만 백성에게 만큼은 정말 따뜻했던 왕이다. 워낙 영조 시대에 궁궐 내 정치 상황이 급변해 영조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 그 방면에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명군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준 군주다. 내치에서는 철의 군주, 백성에게는 따뜻했던점을 보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한 면모를 많이 보였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급변하는 시기를 잘 극복한 왕. 다만 유교국가에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던 왕으로 평가하고 싶다.

소통능력 C+
결단력 B+
도덕성 D+
일관성 B
열정 A
결과 B


<정조>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세손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조가 정치적으로 왕권을 많이 강화시키고 와서 정조는 다소 정치계는 많이 안정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영조가 바랬던 군주상을 그대로 닮았다. 그는 학문적 식견이 워낙 뛰어나 신하들을 식견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다. 정조대에 경연이 폐지되었는데, 다른 국왕처럼 신하들에게 한소리 듣는게 귀찮아서가 아니라 정조는 정말 신하들로부터 배울게 없어서 였다. 경연을 열어봤자 신하와 왕의 학문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있다보니 정조 혼자서 계속 신하들에게 유학에 대해 교육만 하게되고 경연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반대로 마치 유교 학문을 뽐내는 오디션과 같은 '초계문신제'를 실시했다. 정조는 유교 경전 토씨 하나 안틀리고 전부 외웠다고 하니 말그대로 천재+노력형의 사기캐릭터.
   신하들도 이미 이런 정조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조의 성향상 신하들은 파워게임에서 크게 밀릴거라고 분명 예상하고 있었기에 수도 없이 그를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여운형과 더불에 가장 많은 암살 시도 및 테러를 당한 인물 중 한명. 정조 역시 영조의 탕평책을 그대로 계승하게 되나 영조의 방향성과는 조금 달랐다. 온건한 성향의 신하 위주로 등용한 영조와 달리 정조는 능력 위주의 탕평 책을 실시했다. 당파에 관련 없이 뛰어난 인물을 뽑다보니 남인과 소론 실학자 들도 오랜 시간만에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국가에 도움이 되는 힘있고 명망이 높은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실학자 정약용, 유득공은 물론 노론의 영수 체제공, 김조순, 심환지, 박지원과 자신의 최측근 홍국영 등 조선 마지막 인재풀을 가동한 시기이다.
  정조는 신하들을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평가했다. 잘하는 친구에게는 제대로 힘을 실어주고 그렇지 못한 신하들은 과감하게 잘라냈다. 안타깝게 실력자에게 실권을 너무 많이 몰아준 나머지 세도 정치의 씨앗이 심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정조는 워낙 뛰어나다 보니 이런 신하들을 충분히 컨트롤 했다. 하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죽고 실권을 지닌 신하들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며 세도 정치가 시작됐다. 대표적으로 김조순이 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결국 김조순의 후손들로 인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시기가 시작되게 된다.
  정조는 조선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규장각을 설치해 박지원의 제자였던 유득공, 이덕무 등 인재들을 발굴했다. 개혁에는 원래 사람이 많이 필요한 법. 세종이 집현전에서 다양한 인재들과 연구를 시작했듯이, 정조는 규장각에서 세종이 펼쳤던 정치를 실현한다. 우선 영조때 망가져 버린 정치 체제를 복구할려고 노력했다. 남인의 영수인 체제공, 시파의 김조순, 노론의 박지원, 심환지 등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토론하는 정치를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모두 포용하려는 영조와 달리 선을 넘는 신하들에게는 가차없이 숙청 작업도 들어갔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문체 반정.
  경제 분야에서 신해통공을 통해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당시 상업사회는 국가에 등록된 시전들만 물품을 팔 수 있었고, 일반 상인들이 물품을 파는 난전을 해당 시전들이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금난전권. 정조는 신해통공을 통해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에 대한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이는 국가가 시장 경제에 대한 권한을 다소 축소 시키고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한 한반도 최초의 자유방임주의적 정책이다. 이는 경제에 관한 국가 권력이 국민들에게 양도되게 된 신호탄이 된 정책이다. 또한, 문체 반정과 서체 반정으로 사회 문화 부분에도 손을 댔다. 어린 유학자들에게 소설 문학과 외국의 문체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좋은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문체를 허용하지 않고 규제했다는 나쁜 점도 존재했다. 정조는 노론 견제 도구와 자국 문화 보호를 위하여 이와 같은 정책을 실시했다.
  정조는 조선 역사 통틀어서 정말 아는 것이 많은 천재형 리더. 팀 내에서 정말 순수하게 실력으로 리더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다. 독불장군에 성격도 한가닥 하기 때문에 부하들을 좀 고생했지만, 좋은 결과를 항상 만들어 냈다. 철저히 실력으로 부하 직원들을 평가하고 이에 따라 상을 다르게 주는 스타일이다. 때론 쿨하지만, 신하들이 작은 실수들에도 가차없이 보고서 집어 던지고 욕을 발사하는 타입. 그래서 굳이 단점을 꼽자면 너무 자기 팀의 이익만 챙겨 다른 집단과의 상호작용과 자신이 물러난 이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기도 했다. 신하들에게 지독하게 굴었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힌다.

소통능력 B
결단력 A+
도덕성 A
일관성 A+
열정 A+
결과 B+

  
 <순조>
  순조 재임기간에 대한 첫 평은 34년이라는 재임기간이 무색하게 한 일이 아예 없다. 웬만한 왕들보다 오랜 기간을 재임했음에도 정말 이룬게 없다. 물론, 순조는 11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정조가 급사하게 되고 영조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들어가게 된다. 정순왕후의 가문인 경주 김씨와 벽파는 정조가 죽자 기존에 조정에 남아있던 남인세력을 찍어 누르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신유박해. 천주교를 믿고 있던 남인들을 박해하게 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영조와 정조때부터 유지되온 탕평 정책이 일순간에 깨져버리게 되고 본격적으로 세도 정치가 시작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앞서 정조에 언급에서도 말했듯이 사후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되게 되었다. 정순왕후가 아무리 정조의 정책을 이어받은 공노비 혁파들을 실행했어도 좋은 평가를 못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순조는 필연적으로 김조순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 했고, 정순왕후의 수렴 청정이 끝나고 남인이 숙청된 와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정조의 충신이자 친 정조 파벌인 시파 김조순 뿐이었다. 순조가 지는 기본적 정책 기조는 가만히 있기였다. 그 결과 김조순의 후손들로 인한 가문 중심 정치체제가 완성되게 되고 안동 김씨의 시대가 오게 된다. 본인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정치에 많은 힘을 못 쏟았고, 정순왕후의 실책, 김조순의 권력 강화 등 여러 요소들이 합쳐지며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를 막을만한 정조 같은 인물이 죽었다는게 정말 큰 아쉬움이다. 
  정치와 별개로 서북지역 사람들의 피해의식이 수면 위로 직접 떠오른 시기다. 대표적 사건이 홍경래의 난. 조선 시기 내내 평안도 사람들은 조정에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했다. 홍경래를 중심으로 서북 지역에 난이 일어나고 평양까지 진격해왔다. 그동안 지속된 지역 감정이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이어지게된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일어나게 되는 다양한 반봉건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 사건. 서북 차별 파타에만 근거한 반봉건 운동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어쨋든 지역 차별, 계급 차별 등 구시대적, 봉건적 사상에서 조선 인들이 깨어나게 된다. 
  순조시기에 순조보다 더 빛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들 효명세자. 재임 기간 내내 시름시름 앓더니 아들은 또 언제 낳아서 세자 대리 청정을 시작했다. 효명세자는 죽어가는 조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단호한 일처리로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좋은 평가를 자주 받고 순조가 왕위를 선양하겠다고 선언하자 많은 신하들이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왕위를 선양 받기도 전에 효명세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요절했다. 겨우 22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급사하게 되었다. 이윽고 몇년 지나지 않아 순조도 시름시름 앓더니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정조부터 3대가 너무 이른나이에 죽게 된다. 안되는 집안은 뭘해도 안된다는 말이 생각 나게 될 정도로 3대에 걸친 급사는 조선을 계속 병들게 했다.
  첫문장에 말했듯, 순조는 34년동안 한 일이 없다. 존재감 제로의 왕. 오히려 수렴 청정을 했던 정순왕후나 대리 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의 공로가 더욱 눈에 띈다. 이양선이 점점 늘어나고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고 있는 시기기에 조선은 대외 정책에 대한 기조가 필요했고, 점차 시민들은 반봉건, 계급 사회 타파를 주장해 가고 있으면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순조의 태도는 수수방관이었고 같은 시기의 신하들은 자기 권력과 재산을 채우기에 바빴다. 앞으로 나올 두 왕에 비하면 정통성이나 권한도 막강했고, 오랜 기간 재임했으나 손을 놓고 있던건 순조의 잘못이 너무나도 크다. 좋은 평가를 받기에 힘들 것이다.

소통능력 D
결단력 F
도덕성 C+
일관성 C
열정 F
결과 F
 

<헌종>
  효명세자와 순조의 급사로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던 헌종이 급하게 왕위에 오른다. 그가 즉위한 나이는 겨우 8살. 조선 왕들 중에서 최연소로 즉위하게 된다. 두번째로 어렸던 단종도 그랬듯이, 어린 왕들은 힘이 없다. 그래서 순조의 부인이었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순원왕후는 바로 김조순의 딸이다. 정순왕후 때에도 그랬듯이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반대파들을 숙청하게 된다. 이번에도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를 축출했고, 이 과정에서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 헌종은 그대로 정치를 잘 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다행히도 할아버지인 순조 보다는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더욱 많이 닮았다. 그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왕실의 큰 어른인 순원왕후와 자주 부딪히게 되었다.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이었던 김좌근을 유배보내는 과정에서 그녀와 많은 충돌을 보였다. 그리고, 총위영이라는 왕실 부대를 만들어 왕권을 강화 하기도 했다.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하며 민심을 회복하는데에도 힘썻다. 특히 지방에서 발생되는 뇌물 증여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조정에 자신의 편이 없었다. 이미 순조와 순원왕후 집권 시기에 주요 요직은 이미 안동 김씨에 의해 독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헌종의 개혁정치에 힘을 써줄 사람이 없었다. 개혁 정책을 펼쳐도 이를 지지해줄 세력이 없어 매번 헌종은 실패했다. 왕권은 이미 약해져 있어 자신의 원하는 대로 조정을 구성하거나 마음대로 권력자를 유배보내지도 못하는 사면 초가의 양상을 보인다. 본격적으로 사람을 모으고 힘을 써야할 시기에 헌종 역시 23살로 요절한다. 효명세자 처럼 아주 짧은 시기 정치를 하고 사라지게 된다. 이 두 부자가 제 명을 다하고 살았더라면 조선 역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헌종과 다음 왕인 철종까지 참 평가를 내리기가 너무 어렵다. 재임기간도 10여년으로 너무 짧았고, 이마저도 초반에는 수렴청정이 존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하층민 사회에서 계급 타파 목소리가 나오는 시기였다는 점이 정말 아쉬운 부분. 많은 행보를 보아 괜찮은 왕이 될 재목을 지녔지만, 이미 무너져가는 나라에서 무엇을 하기엔 너무 늦었던 왕이 었고, 또 다시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소통능력 C
결단력 D
도덕성 C+
일관성 D
열정 C+
결과 D


<철종>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헌종이 죽게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다음 왕이 될만한 인물을 급하게 찾게 되고,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범이라는 먼 친척의 인물을 데려오게 된다. 이원범은 당시에 교동도로 유배를 가 일반 백성과 다를바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부르게된 별명이 바로 강화도령이다. 그가 헌종 다음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 철종이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보니 너무 똑똑한 왕족은 권력으로부터 찍힌다는 속설이 있게되어 많이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종의 경우도 겨우 글만 읽는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철종이 즉위하게 되자 바로 안동 김씨는 손을 쓰기 시작했다. 곧바로 철종의 아내로 안동 김씨의 실세 중 한명이었던, 김문근의 딸인 철인왕후를 추천하게 된다. 그녀는 순조 비였던 순원왕후, 효명세자 비였던 신정왕후, 헌종 비였던 효정왕후 세명의 궁궐 어르신들을 잘 모셨다고 전해진다. 
  직접 서민들의 삶을 몸소 체험한 철종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마자 민심 개혁을 실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임 왕 헌종이 그랬듯이 조정에 철종편은 헌종보다 더 없었다. 정통성도 측근도 없던 철종은 헌종보다도 실권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허수아비 왕이 된다. 리더로서의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그 역시 30대 초반에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철종시기에 삼정의 문란이 극도로 강해져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대표적 사건이 임술 농민 봉기. 힘이 약했던 조정과 관군은 제대로 힘 쓰지도 못하고 민란에 크게 당했다. 나라가 혼란해가니 곳곳에서 말세론이 퍼지게되고, 이 당시 동학이 민간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다. 바다에서는 이양선이 계속 출몰해 시민들을 약탈했다. 철종은 삼정의 문란을 막기위해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이를 수습하려고 시도 했지만 안동 김씨의 견제로 이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안동 김씨에 의해 강제로 세워지게 된 허수아비 왕이었던 철종. 철종 역시 리더로서의 보여준 면모가 너무 적어 평가를 내리기 힘들지만 몇번의 시대로 불운한 시대상. 그리고 강화도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았던 점. 비록 직계는 크게 다르지만 헌종과 매우 비슷한 길을 걷고 끝나게 되었다.

소통능력 D+
결단력 D
도덕성 D+
일관성 D
열정 F
결과 F


<고종>

  드디어 조선 왕들 평가의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 고종이다. 철종이 죽자 다시금 조정은 다음 왕위를 이어 받을 사람이 필요했고 철종을 대신해 거론되기도 했던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을 왕으로 점찍었고, 그가 바로 고종이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그의 아버지인 이하응,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게된다. 그가 첫번째로 한 것은 바로 악의 축 '비변사' 폐지. 독재시기의 계엄령처럼 전시도 아닌데 운영되는 비변사를 통해 온갖 나쁜짓을 하던 세도 정치의 중심 권력 기구를 폐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정의 문란을 서서히 개혁했다. 그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 이양선과의 두 차례의 전쟁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앞서 두 왕들과 다르게 서서히 조선을 바꿔 나갔다. 아무리 시대상이 안좋고 변경거리가 많은 헌종과 철종 이었지만, 둘 보다도 정통성이 떨어졌던 흥선대원군이 세도 가문에 맞서 정치를 펼쳐 나갔고 좋은 면모를 보인 것은 분명 한번 쯤 생각해볼 부분. 흥선대원군의 11년 통치가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된다.
  세도정치에 신물이 났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며느리로 가까운 친지가 없던 고아 출신인 명성왕후 민씨를 점찍었다. 외척들이 조정에서 판을 치는 꼴 안보려고 그녀를 택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 집권 기간에 여흥 민씨는 힘을 전혀 쓰지 못했다. 그러나 고종 대에 여흥 민씨들은 안동 김씨 못지않은 권력과 부패를 누렸다. 처음에 이들은 친러시아를 표방하며 나라를 팔다가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에게 줄을 대며 자신들의 권력을 이어나가는데 집중했다. 조선 망국에 아주 크게 기여한 집안. 어쨋든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권력을 조정 내에서 지우기 위해 외척이었던 여흥 민씨 세력을 파트너로 삼게 된다.
  그러던 중 그가 첫번째로 마주하게 된 큰 사건이 바로 운요호 사건이다. 이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지켜왔던 쇄국 정책 기조가 바뀌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운요호를 통해 광성보와 초지진을 공격해왔다. 이미 프랑스와 미국 해군에게 크게 당한 전과가 있는 조선이 왜 또 다시 일본에게 당했는가 살펴보면, 고종과 민씨 정권을 군사비를 자기들 배에 채우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쇄국정책이 옳았든 아니었든 대원군은 이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사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고, 미국 남북전쟁 승리의 상징이었던 제너럴 셔먼호를 침몰 시킬 수 있었다. 반면 고종과 민씨 정권은 개화를 구실로 군사비를 크게 위축 시켰고, 서울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 강화도가 쉽게 뚫리게 되는 계기가 된것이다. 결국 앞으로 일본과 수없이 체결하게 되는 불평등 조약의 시발점인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조선은 처음으로 외세와 근대적 조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
  비변사가 폐지되니 이번에는 선혜청이 문제였다. 안동 김씨가 비변사를 이용해 온갖 못된짓 하는거 그대로 배운 민씨 가문은 대동법을 장관하던 기관인 선혜청을 장악해 국민들에게 벌어들이는 세금으로 자기들 배를 불리는 데 사용하게 된다. 누군가 배를 불리면 누군가는 굶주려야 하는 법. 세금 돌려 쓰다보니 구식 군인들에게 주는 봉급이 밀리게 되고, 그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해당 군인들이 처음에 이런 불만을 얘기하자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월급이 밀리고도 규율을 지킨 군인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선조와 전직 모 대통령과 같이 유체이탈 화법을 보여주며 리더로써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 사태까지 오게 되는데 국가 최고의 리더인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무능한 리더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구식 군인들은 창덕궁에 쳐들어가게 된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왕이 직접 살고 있는 궁궐을 습격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그들은 대원군의 복귀를 원했고, 그를 찾아가 다시 대리 청정을 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권력욕에 눈이 먼 고종과 민씨가 결국 청나라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임오군란 사태를 보면 그가 왕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권력욕이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위해 그때그때 파트너가 바뀌었다. 흥선대원군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처음엔 민씨 정권과 권력을 잡고, 임오군란이 일어나니 청나라와 동학 동민 운동이 발발하니 일본과 손잡고, 을미사변 이후 일제의 힘이 강대해지니 아관 파천으로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대한제국 선포때 개화파랑 손을 잡더니, 그들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자 또 간신들과 손을 잡는다. 리더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고종은 이리저리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렸고, 일관성 없는 정책의 결과는 식민 지배를 가져왔다. 자신이 믿는 신하 없이 그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만 실시한 정치를 했다. 광무개혁 등 대한제국에 필요한 여러 근대적 정책을 많이 들여오게 되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을미사변 이후 조정을 완벽하게 장악한 일본에 의해 계속 휘둘리게 되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이나 식민 지배 하에서 1919년까지 독립 운동을 지원 했다는 점은 그마나 그에 대해 높이 살 부분이다. 고종은 늘 한발 늦었다. 구식 군대에게 월급 준다고 해놓고 질질 끌다가 임오군란으로 이어지고, 동학 동민 운동도 수수 방관하였고, 근대 개혁을 시기할 시기 쯤엔 이미 우리나라의 많은 권력이 일제에 이양되었다. 그래도 일본의 힘에 마냥 무너지지는 않게 몇가지 조치를 시행했지만, 전부 실패했고 항상 늦었다.

소통능력 D+
결단력 F
도덕성 B
일관성 F
열정 C
결과 F



  드디어 모든 조선 왕들에 대한 개략적인 평가가 끝났다. 처음에는 그냥 조선 왕들이 우리 회사에 있는 팀장이었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로 써본 글이었는데, 내가 조선 왕들에 대해 아직 한참 모르고 있었고, 그들에 대해 배우게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저번 학기가 너무 바빠서 긴 시간이 걸린 글이었지만, 조선 왕들에 대해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역사를 보며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이들을 보며 좋은 리더가 되기위해 지녀야할 덕목을 알 수 있었으면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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