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역사 전쟁 이야기

여운형, 하나된 대한민국을 꿈꾼 정치가 - 2

gyulee0220 2019. 12. 8. 17:15

건준위의 여운형



(1편 : https://adrian0220.tistory.com/177)


  해방 이후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이었지만 실상을 전혀 달랐다. 건준위의 노력으로 치안은 어느정도 유지되었지만 여전히 국가 방향을 놓고 많은 사상가와 정치인들이 충돌했다. 그러자 미군정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미군정을 상대로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건준위을 중심으로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당연히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좌익 정치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을 좌우 합작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미국, 우파 정치인과 협상을 위해 서울을 비운 사이 박헌영이 여운형을 내쫓고 인민공화국 인사들을 전부 좌익 정치인으로 바꿔버린다. 박헌영에 의해 인민국화국은 사회주의 조직으로 전락해버렸고, 협상력을 잃은 여운형은 좌우 합작에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결국 안재홍, 김구 등 우파 정치인과의 협상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지지 기반마저 박헌영에게 뺏기게 된다. 

  미군정은 조선인들의 정치활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빌미로 치안유지권도 완전히 미군에 내주게 되었다. 미군정은 사회 안정을 목적으로 일제 강점기 때의 경찰들을 복귀 시키면서 점차 대한민국에 다시 한번 먹구름이 찾아오게 된다. 미군도 처음에는 여운형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의 화려한 이력이나 인기는 충분히 활용가치가 높았다. 하지만 여운형이 미국과 선을 그었고 미군정은 이승만을 활용해야겠다고 판단한다. 결국 미군은 10월 23일 이승만을 귀국 시켰다. 여운형은 이승만을 찾아가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여운형은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한번의 실패를 겪은 여운형이기에 이번엔 생각을 바꿨다. 미군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것이다. 미군정 역시 건준위와는 다르게 조선인민당의 활동을 어느정도 승인을 했다. 여운형은 좌익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당기에 태극을 넣는 등 우파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과 더불어 유이하게 영어가 능숙한 조선 지도자임을 어필했다. 1945년 12월 23일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 추념대회에 참여하며 좌익 이미지를 바꾸려고 힘썻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오보사건을 계기로 좌우간 대립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우익 정치인들은 신탁통치에 결사 반대를 외치며 반탁운동을 이어갔고, 좌익 정치인 박헌영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며 두 노선의 양극화가 일어난다. 여운형은 우선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을 보류했다. 여운형의 목표는 좌우 합작과 자주 대한민국이었다. 그는 우파 조직인 한국 민주당 등 지도자들과 임정세력을 만나면서 신탁통치는 하되 우리의 자주성을 보장 받자는 주장을 하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신탁통치는 반드시 대한민국 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합의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정 지도자들은 여운형의 의견에 동의를 하며 합의가 되는 듯 하였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좌우 합작 운동의 실패로 좌절하고 있을 때 즈음 그의 놀라운 활동력과 영어 실력 그리고 그의 탁월한 대화 능력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다시 여운형과 대화를 시도 했다. 김구와 이승만에게 일을 맡겼더니 쿠데타나 계획하고 있었고, 박헌영은 애초에 대화가 안통하는 인물이었고, 안재홍은 국가의 지도자로 내세우기엔 능력이 조금 부족해보였다. 결국 미군을 좌우를 아우를 수 있고, 탁월한 능력과 높은 인기를 지닌 여운형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민다. 이미 고령이 된 여운형에게는 정말 일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여운형은 동지 김규식과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한다.



여운형의 두번째 정적 박헌영




  1946년 7월 25일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한다.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모두가 포함된 좌우 통합 조직을 세우는 데 성광한다. 하지만 예상대로 이 조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박헌영은 토지를 모두 국가가 몰수하고 미군정을 종료할 것을 요구했다. 협상을 하자고 앉은 테이블에서 자신의 의견만 주장한 것이다. 우익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친미 부르주아이자, 미국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며 비판을 했다. 반대로 우익 정치인들은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여운형은 미군정 몰래 북한과도 협상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보다 더 대화가 안통하는 인물이다. 결국 여운형이 야심차게 준비한 좌우 합작 위원회는 오래 못가고 갈라졌다. 

  여운형도 이번엔 강경하게 나갔다. 박헌영이 김일성을 등에 업고 남한 마저 적화 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것이다. 여운형은 미군정에게 7월 29일에 있을 위폐 사건 재판을 엮어 그를 투옥하라고 암시를 했다. 하지만, 박헌영이 한발 더 빨랐다. 공산주의자들이 늘 그렇듯 박헌영은 다수의 정치 깡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이들을 활용해 여운형 계열 정치인들을 탄압하고 좌우 합작 위원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넣었다. 그리고, 인민당 내부에서 표결에 붙여 결국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고 자신의 세력을 불렸다. 여운형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우파 정치인들의 협력으로 친일파 숙청, 행정 기구 설립 등의 조건을 내세워 개혁 입법을 주도한다. 하지만 박헌영이 심어놓은 프락치들의 격렬한 반대로 이마저도 무산된다. 



여운형이 피살되었던 혜화동 로터리




  이 일을 계기로 정치에 신물이 난 여운형은 12월 4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본인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급박한 대한민국의 정세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좌우측 모두 인기가 높은 여운형의 도움이 필요했다. 미군 측에서도 좌익 세력과 대화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우파 측에서는 대중적인 지지가 좌파에 밀리는 와중에 여운형이 자신의 세력에 가담하게 되면 대중의 인기를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좌익 세력 내부에서도 박헌영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 여운형이 필요했다. 단 한사람 박헌영 빼고는 그의 복귀를 모두 바라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7년 3월 인도에서 열린 범아시아 회의의 한국 대표로 임명되며 다시 정계로 복귀한다.

  다시 정계에 돌아온지 4개월 쯤이 되던 1947년 7월 19일 IOC 가입을 축하하는 기념 대회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 조선 체육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여운형은 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계동에 있는 집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혜화동 로터리를 지날 때, 파출소에서 트럭 한 대가 나와 리무진을 막아섰다. 그 사이 갑자기 한 청년이 느닷없이 차의 본네트 위에 올라 여운형에게 두발의 총탄을 발사 했다. 급하게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치명상을 입었기에 2분만에 사망했다. 그의 곁에 있었던 고경흠의 말에 따르면 그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 이었으며 미소를 띈 얼굴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여운형을 저격한 청년의 이름은 한지근이었다. 여운형은 그렇게 6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가 죽은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는 완전히 무너진다. 더불어 미소공위 역시 무산되며 결국 한반도 문제는 UN으로 넘어간다. 그가 죽자 많은 민중들을 슬픔에 빠졌다. 많은 서울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흰 옷을 입고 활동했다고 한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이 영결식에 60만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평소 친분이 있던 손기정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서울 우이동에 현재 그의 묘소가 위치해있다. 

  한지근은 끝까지 암살 배후를 밝히지 않아 그를 죽인 직접적인 배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지근이 평소 노덕술 등 극우 친일 세력 인사 관련 인물들과 자주 다녔다는 설이 있었기에 이들에 의해 사망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박헌영이 여운형의 암살 배후라고 주장하기되 한다. 사실 그는 광복이후 무려 2년간 총 12차례의 테러를 당했다. 극우 인사들과 박헌영 계열은 그를 죽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길을 걷던 도중에 괴한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벽돌이 날아와 머리에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갈 때 갑작스럽게 총알이 날아왔으나 운좋게 피했다고도 전해진다. 갖은 테러에도 그는 매일 “끝까지 이 길을 가겠다.” 라고 선언했다.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는 여운형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비견하며 극찬했다. 또한 동지 김규식 역시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하루 아침도 쉬지않은 남자, 반대파 마저 매료시키는 매력을 가진 남자 여운형은 결국 좌우 합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도 또다른 목표 중 하나인 조국 독립은 이뤄냈으니 그의 인생이 실패로 끝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여운형 장례식




국가의 독립과 통일 대한민국을 꿈꿨던 좌우 통합 지도자


  우선 그가 했던 항일 독립 투쟁에 대해 폄하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한 제국 당시 잘나갔던 집안의 자재로 풍요롭게 지낼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전부 대한 독립을 위해 사용했다. 동생과 함께 재산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 던 점, 그리고 자신이 먼저 죽고 동생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그리고 그의 독립운동이 다른 독립운동과들과 조금 다른 점은 일본에 대한 비판이 아닌 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다. 단순히 일본만을 겨낭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엔 일본이 꽤나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서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등 제국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행동을 이어갔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을 특히나 자주 비판했는데, 이 때문에 훗날 영국 경찰의 추적을 받고 일본 정부에 체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결국 일본의 자신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펼쳐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할 것임을 정확히 예측했다. 이 두가지 행보로 봤을 때 독립운동가 중에서 국제 정세 판단력과 이를 통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 지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매우 좁은 시야로 조선 독립을 외친것이 비하면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어느 누가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는 사람을 곱게 볼 수 있을까? 그는 조선 독립을 위해 다른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나라에 도움을 주어야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으로 넘어가 많은 중국인들이 영국과 일본과 투쟁하는 것을 도와주고 동남아 국가에서의 독립운동도 지원하며 다른 나라의 도움을 주었고, 여운형이 훗날 조선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움을 받고 지도자 중 명성을 얻는데엔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성향이 한 몫 했다. 그의 이런 헌신은 분명 조선 독립에 큰 공헌을 세웠다.

  

  그의 최대 강점 중 하나가 바로 매력이다. 외모도 잘생겼고 풍채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 패션센스도 좋기로 유명했다. 마당발이었던 만큼 공식 석상에 자주 나갔던 여운형이었는데, 그때마다 양장점으로 가 멋있는 옷을 골랐다. 그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데는 외모도 큰 역할을 했다. 잘 꾸미는 사람이 더 신뢰를 받는 것은 세상 이치이다. 여운형을 이 점을 잘 알았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람을 만날 때 항상 멋있는 외모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그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이를 활용해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더불어 그는 관심 분야가 정말 많았다. 특히 체육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일제 강점기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손기정과도 친분이 있었다. 게다가 중국에 있을 당시 야구를 너무 좋아해 직접 야구단 활동도 했다. 이런 체육 활동이 단순히 개인의 취미로 그친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여운형은 조선 체육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스포츠가 조선의 많은 청년들을 일깨워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포츠 활동을 통해 건전한 취미 생활과 신체 활동으로 삶의 활력을 찾는 것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독립의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기정은 여운형이 이런 가르침을 받들어 그가 죽은 뒤 대한민국에서 체육 발전을 위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좌우 합작 운동 만평 (좌: 여운형, 우: 김규식)




  사실 그의 평가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좌우 합작 운동이다. 그가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의 활동 때문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인기는 엄청났다. 광복 당시 조선에 남아있었던 몇 안되는 지도자 였던 것도 한 몫했다. 그는 해방 이전부터 일제의 패망을 미리 예상해 한반도의 혼란을 방지했다. 많은 국가들이 해방 이후에 사적인 감정을 내세워 보복 살인을 하고, 또 이를 막기 위해 기존 지배 세력이 계속 폭력을 휘두르는 대 혼란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비교적 평화롭게 이 시기를 넘겼는데, 이는 여운형의 공이 매우 크다. 패망 직전 일본 총독부와의 협상을 통해 건준위에서 치안 유지권을 받아왔고, 한반도 내에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과 조선인들의 안전을 보호했다.

  만약 여운형과 건준위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기존 식민지 지배 세력과 조선 인들의 보복이 일어나 한반도 내의 대 혼란이 왔을 지도 모른다. 일본이 한반도를 빠져나가고 미군정이 한반도로 올때 까지 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공백 시기가 발생하는데 여운형이 이 시기를 잘 지나갈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 노선을 유지했다. 중도주위자가 그렇듯 반대파에게 공격당하기 쉽상이었는데 여운형은 끝까지 중도 주의 노선을 유지했다. 분명 공산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고려 공산당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익 정치인과도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중간 노선을 찾는데 노력했다. 대표적인 해방정국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박헌영과 차별이 되는 부분이다. 그는 자기 계열 사람이 아니면 전부 배척했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최대 정적으로 해방정국에서 그가 하려던 모든 일을 방해하던 사람이다. 독립운동을 할 떄 같이 소련과 중국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동지에서 최대 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우파 정치인들도 여운형을 꽤나 신뢰했다. 초기에 우파는 박헌영에 비해 인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기반으로 여론을 어느정도 회복했지만, 어쨋든 해방정국 초기는 좌익 정치인들이 여론을 주도했다. 그래서 우파 정치인들은 당시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중도파 여운형을 섭외하려고 노력했다. 극단주의는 어느 사회에서나 배척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좌익과 우익 모두 극단주의 이미지를 받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여운형 영입 만큼 극단주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박헌영을 제외하고는 우파와 좌파세력 모두 여운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여운형의 세번째 정적, 송진우




  1945년 10월 선구회라는 조직에서 당시 한반도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누구인지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여운형은 무려 33%의 지지율을 받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미소공위가 열릴때, 소련은 임시 정부의 수상을 여운형으로 지목했고, 미군정 역시 조선인들을 효율적으로 컨트롤 하기 위해서 그를 지도자로 내세웠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이렇게 미소 양국으로 부터 지지를 받은 경우는 드물 것이다. 초기에 미군정 역시 이승만을 지원하면서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부 설립을 기획했지만, 이승만에 정읍에 내려가 뻘소리하고 대놓고 미소공위의 참여를 부정하자 여운형으로 지지를 선회한다.

  이렇게 둘의 노선이 달랐던 것은 그들이 꿈꾸는 목표가 달랐다. 이승만은 애초에 대통령이 목표였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에 유리한 방안인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것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건 개인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다. 다만, 자신의 권력보단 민족을 위한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사람과 대통령을 목표로 삼은 사람 중 누가 더 위대한 가를 논한다면 당연히 전자이다. 해방 정국에서 김구나 여운형이 이승만보다는 고평가를 받아야 공정한 것 아닌가? 심지어 여운형은 인민공화국 수립 당시 정적이었던 이승만에게 지도자를 부탁했다. 민족이 누구보다 사랑했고,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운형이다. 시대를 관통한 풍운아 이면서 정말 멋진 인생을 산 사람이다.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운동이 진행된 덕수궁 석조전



자신의 사상적 기반 없이 좌우 합작만을 바란 실속 없는 기회주의자


  중도주의는 허상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말하면 문제가 너무 쉽게 해결된다. 여운형이 그랬다. 그가 국민적인 인기가 있었던 지도자임은 이해 하겠는데, 그의 사상을 한줄로 요약하라고 하면 아무도 못한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지지자이기도 하고, 공산주의자 이기도 하고, 자유주의자 이기도 하다. 사상적 기반이 너무 약하다. 좌익 정치인들이 찾아오면 그들의 의견도 옳다 하고, 우익 정치인이 찾아오면 그들의 의견도 옳다고 말한다. 양보 정신은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원하는게 뭐냐고 물어보면 민족만을 답한다. 20세기 황희 정승이나 다름없다. 사람 좋고 민족을 생각하는 착한 바보쯤 되는 포지션일지도 모른다.

  혁명에 성공했던 사람들은 확실한 사상 기반이 존재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무기를 들었던 레닌과 삼민주의를 주장했던 쑨원은 모두 탄탄한 사상적 기반으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반도에서도 이성계가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 정도전이 닦아놓은 유교 사상이 큰 몫을 했다. 여운형은 확실이 이런 사상 기반이 부족했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할 것이면 더 확실히 자신의 사상을 밀어 붙여야했는데, 좌우 합작이라는 허상에 빠져 그저 모두의 손을 들어주며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합의만 계속 해나갔다. 심지어 그는 북한에도 방문하며 하나된 한반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북한에 간 노력 자체는 인정하지만, 대화 상대도 절대 말이 안통할 김일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끊어 낼 때는 확실히 끊어 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지도자가 되기에 권모 술수도 너무 부족했다.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타인에 대한 계략 같은 건 전혀 없이 이상 주의만 주장했다. 사람은 좋은 데 능력 없는 케이스가 어쩌면 딱 여운형일지 모른다. 미군정도 정확히 여운형의 이런 점을 파악했다. 분명 인기도 많고 써먹으면 충분히 높은 가치가 있는 인물인데, 막상 일을 맡기면 잘 하지도 못할 뿐더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주지도 않는다. 사회 안정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지시했는데, 김일성이랑 협상을 하려고 있으니 미군정 입장에서 미칠 노릇이었다.

  그리고 고집이 너무 강했다. 사상적 고집은 없는 사람이 막상 민족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웠다. 사실 그가 당했던 테러 중 몇차례는 미군정이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운형에게 조심하라고 일러 줬는데, 민족을 위한 길이라면 끝까지 가겠다라는 신념으르 안굽히고 위험한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 결국 한지근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신념을 알겠는데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끔은 자신의 고집을 굽히는 태도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확실히 든다.


  그의 이력이 너무 화려한게 도리어 문제가 되었다. 독립운동 당시 공산당을 조직해 레닌과 만나 코민테른 활동도 이어갔는데, 이는 우익 정치인들에게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에게 공산주의자 프레임을 씌우기 매우 쉬웠다. 그리고 분명 공산주의 활동을 한게 맞다. 이 부분은 변명할 거리가 없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안전을 위해 총독부와 협상을 하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건강이 안좋아서 가족들이 전향서에 서명을 했는데 이 두가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라는 모함까지 받는다. 여운형 입장에선 정말 답답할 노릇이지만, 반대파 입장에선 상대방의 잘못 하나를 집요하게 파고 들수 밖에 없다. 비열하긴 하지만 그게 정치판이다. 오늘날 청문회에서도 사소한 잘못 하나로 그 사람을 떨어뜨리기 위해 온갖 발악을 다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당시대에 같이 활동했던 정치인들에게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동시대 활동했던 나용균은 그가 너무 자기 선전을 많이 한다고 비판했고, 독립운동가 박진목 역시 이름 팔기를 좋아하는 매명주의자라고 평했다. 남로당 원이었던 박갑동 역시 그는 우유부단하고, 생각이 모호하다라는 악평을 한다. 게다가 훗날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는 그의 동생 여운홍 역시 형의 가장 큰 실수는 박헌영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끝까지 감싼 것이라고 평가를 할 정도였다. 그는 모두를 사랑하려다가 모든 것을 잃은 기회주의자이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총평


  위의 업적만 봐도 그가 정말 어마어마한 활동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정국을 모두 경험했고, 이 시기에 국가를 위해 이것저것 도움이 되는 것들은 다했다. 그래서 좋게 보는 사람들은 그가 국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말하고 있는 반면,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 입장은 활동만 많았지 실속은 별로 없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것이 딱 이렇다할 사상이 없이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간의 좌우 합작을 위해서 노력 했을 뿐 자신만의 뚜렷한 가치관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사상은 사회민주주의에 포함된다고 하지만 국가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관도 한수 접으며 좌우 합작에 힘썻다. 이는 대통합을 위한 양보로 볼 수도 있지만, 줏대없이 이곳 저곳에 붙은 기회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쉽다. 위치 자체가 비난 당하기 쉬웠고 친구는 많았지만 뜻을 같이할 동지는 없었다. 항일 운동 당시엔 같이 힘 썻던 안재홍, 박헌영, 이승만 등이 결국 해방정국에 가서는 그의 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나마 김규식만 뜻을 같이해 오랜 시간 자신의 동지로 활동했다.


  그래도 여운형 만큼 일생 내내 열심히 민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은 또 없다. 기회주의자도 맞고, 실속이 없던 것도 맞다. 공산주의 활동은 충분히 비난 받을만 하고, 김일성과의 대화 시도도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근데 그의 이런 행적은 모두 민족을 생각해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게 수탈 당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행복해졌으면 했고, 남북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민족의 행복을 진심으로 염원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전부 다 민족을 생각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정말 민족을 사랑해서 그런 행동을 한것이다.

  

  여운형은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이다.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실패했고,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누구보다 사랑받은 지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산주의 행적으로 비난하기에 그는 너무 멋진 삶은 산 사람이다. 분명 재평가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