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대표적인 무능한 지휘관
무능한 지휘관은 유능한 적보다 더 무섭다. 수많은 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무능한 지휘관이 아군을 패전의 수렁 속으로 집어 넣은 경우가 참 많다. 지휘관의 멍청함 속에 많은 수많은 장병들이 죽거나 다치게 된 경우다. 군대 비속어 중 하나인 주적은 간부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이 무능한 지휘관들이 국가와 군대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는지 알게되면 정말 피가 거꾸로 솟게 된다. 그들을 믿고 따랐던 젊은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아픈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한중일을 대표하는 가장 무능했던 지휘관 3명을 소개해볼까 한다. 한명씩 그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무타구치 렌야 - 임팔 작전
세계 2차대전에서 무능한 지휘관은 참 많았지만 그 중에 최고봉은 단연 이분이 아닐까 한다. 바로 일본 15군 중장 무타구치 렌야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는 갖가지 실책으로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과달카날 전역 이후 태평양 전쟁의 기세는 미국쪽으로 확실하게 넘어갔다. 미군은 사이판, 괌을 중심으로 일본의 보급로를 철저하게 끊어 내면서 일본 제국을 압박했다. 일본은 이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고, 이때 눈에 들어온 지역이 바로 인도다. 미크로네시아 지역과 필리핀에서 완전히 밀리자 그마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기반으로 인도를 공격해 영국을 압박하고 종전 협상에서 더 큰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이었다. 일제는 인도 공략 보다 좋은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인도를 가기로 결정했고, 이를 위해 넘어야 하는 나라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미얀마인 버마 였다.
임팔은 버마 국경지대에 있는 인도의 도시다. 이 곳을 공략하기 위해 일본군은 작전 총 사령관을 임명하게 되는게 그 사람이 바로 무타구치 렌야였다. 무타구치 렌야는 사령관으로 발탁 될 당시 델리(당시 인도의 수도)를 자기의 발 아래 놓겠다 호언장담을 했다. 렌야는 임팔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세우게 된다. 당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모두 뱅골-버마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와이와 미크로네시아에서 이미 미끄러졌고, 장제스의 반격으로 서서히 중국-만주 전선에서도 일본군은 크게 밀리고 있는 와중이었고, 더 이상 만주국에 신경쓸 여력이 없던 일본군의 마지막 보루는 인도차이나였다. 반영감정이 컸던 인도 사람들에게 일본군은 오히려 희망이었으나, 자유 인도 정부와의 연합으로 영국-중국 군과 상대하게 되어 나름 해볼만한 전투였다. 다만, 임팔 선택이 최악이었다. 임팔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늪지대를 거쳐가야 했다. 늪지대에서는 트럭이나 자동차가 움직이기 매우 어려웠기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렌야는 보급이란 적에게서 취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임팔 작전을 강행 했다.
이와 비롯해 명언을 남기게 되는데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 1944년에 느린 소나 말로 보급을 하려는 생각 자체가 참 구시대적 발상인데다가, 원래 보급을 담당하는 소와 말 조차도 먹이를 주어야 계속 움직인다. 또한 소들은 사람 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실제로 임팔작전때 보급을 담당한 대부분의 소들은 굶어서 죽거나, 포격소리에 놀라 낭떠러지에 떨어저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들의 먹이인 마초 같은 경우는 부피가 커서 험난한 습지를 이동하는데 매우 비효율적이다. 렌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를 이용한 보급, 이마저도 양이 너무 많이 부족했지만 이런 작전을 강행했다.
그의 두번째 명언은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는가?”이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덩케르크만 보더라도 세계 2차대전에서 항공기의 역할은 어마어마했다. 기본적으로 해군이든 육군이든 항공에서의 시야 확보가 이루어져야 더욱 수월하게 작전을 펼칠 수 있다. 영화에서도 톰 하디가 맡은 공군 파일럿 한명이 수만명의 영국 병사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독일군 역시 영국군의 퇴각을 끊기 위해 비행기로 폭격을 시도 한다. 물론, 저 말의 의미는 항공에서도 시야 확보가 어려운 정글 지대이기 때문에 비행기가 필요 없다고 말한 듯 하다. 그래도 항공 시야가 확보된 육군 작전과 그렇지 못한 작전의 차이는 엄청나다.
또 하나의 명언 중 하나가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차고 이마저 없으면 이로 물어 뜯어라”이다. 이쯤되면 정말 중장이라는 계급을 어떻게 달았는지 참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수만명의 사단을 이끌고 가는 총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사기를 충전 시키기 위해 한말 처럼 보이나, 진짜 탄환이 없는 상황에서 저말을 하면 위험하다. 총알 보급은 제대로 안되고 배는 고파 더이상 힘없는 병사들에게 저런말을 했다간 바로 항명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렌야는 더군다나 저 말을 실천했다는게 무섭다. 전쟁에 대한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고, 보급 준비도 완벽할 때 저 말을 한다면 사기가 오르겠지만, 렌야는 저 말대로 하기 위해 실제로 총알 보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의 아사자는 4만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전투에 돌입하기도 전에 죽은 숫자가 저정도이다. 전투 불능자까지 합치면 총 7만의 군대로 갔지만, 전투에 참여한 인원은 불과 1만 2천명이라고 한다. 정말 지휘관의 무능 자체로 저 수많은 인원이 죽어나간 것이다. 무타구치 렌야의 실책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 외에도 정말 많으나, 가장 대표적인 임팔 작전에서의 실책을 소개했다.
2. 유비 - 이릉 대전
정치력이나 통솔력면에서는 아주 뛰어난 군주였던 유비는 전쟁 지휘관으로서는 매우 무능했다. 이를 알려주는 대표적 사건이 바로 이릉에서의 대패다. 사실 이릉 전쟁 자체가 정치적으로 엄청난 실책이었다. 제갈량이 세운 천하 삼분지계를 흔들게 되었다. 제갈량의 위나라 공략 작전은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한중-장안 루트의 익주 전선과 상용을 거점으로 해 남양지방을 오나라와 협공하는 두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의 동생들에 대한 복수심만 가지고 전쟁에 뛰어들었고, 결과는 당연했다. 이로서 제갈량이 꿈꿨던 형주 전선은 완전히 오나라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물론 유비 입장에서의 선택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상황은 정치적인 분석과 실리적인 분석이었다. 사람도 자주 감성이 이성을 이끄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운영하는 국가도 마찬가지다. 형주는 분명 촉나라 땅이었지만, 위나라와 협력하여 형주를 빼았고 촉나라 최고의 무장이자, 황제의 동생인 관우가 이 과정에서 죽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오나라는 그제서야 화해 요청을 촉나라에 보냈다. 사람이라면 머리 돌아가버리는 상황이다. 동생을 죽이고 촉나라 영토를 빼앗은 가해자와 손잡고 짝짝꿍 하자는게 유비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짓이다. 그래서 유비는 오나라의 화해 요청을 당연히 무시하고 바로 오나라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된다.
복수심에 불탄 촉군의 기세는 꽤나 매서웠다. 형주로 진격해가난 촉군은 파죽지세로 이릉성까지 도달한다. 이릉성은 형주의 중심지인 강릉성을 수비하기 위해 만든 요새였다. 당시 이릉 태수였던 손환은 성을 포위 당하게 된다. 당시 오나라의 사령관은 육손이었다. 손환은 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나라 왕 손권의 친인척인사였다. 육손에 부하들은 손권의 친척인 손환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주장 했지만, 육손은 끝까지 손환을 구하러 가지 않고, 수비에만 집중했다. 이릉 옆에 있는 이도를 유비가 공략하러 갔을 때에도 육손은 끝까지 수비로 일관했다. 육손은 장기전을 바랬다. 그랬기에 무의미하게 이릉성을 구하러 가기 위해 병력을 소모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유비 입장에서는 속전속결이 필요했다. 전쟁에서 강을 따라 진격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그 이유는 걸어서 하는 보급 보다 배를 이용한 보급이 훨씬 효율적이고, 이동 속도도 매우 빠르다. 게다가 강은 수비하기 어렵다. 도하 작전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지만, 수륙병진을 이용해 안전한 도하에만 성공하게 된다면 적군의 주요 거점을 쉽게 격파 할 수 있다. 또한, 주요 도시들은 강변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비는 아직 영향권을 행사할 수 있던 남형주의 반란을 통해 안전하게 장간을 끼고 이동해 강릉성을 공략하는게 베스트 작전 이었다. 머나먼 익주에서 보급을 오랜 기간 받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유비는 육손이 원하는 장기전 돌입에 그대로 응하고 마는 실책을 보였다. 보급 기반이 약한 형주에 눌러 앉아 전선을 늘이는 미친짓을 했다. 타국에 들어가 전선을 늘이는 것 처럼 비효율 적인 방법이 없다. 육손이 반격하지 않고 끝까지 수비한 이유가 여기에 있던 것이다. 전선이 길어질 수 록 형주의 보급 기반이 약한 유비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늘어진 전선은 수비의 어려움만 가중시킨다. 모든 곳을 수비하려는 것은 아무것도 안지키려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길게 늘어진 전선 역시 그랬다. 육손은 손쉽게 유비의 진지를 화공으로 공략하게 되었고, 이로서 이릉에서 촉나라는 대패하고 후퇴하게 된다.
정사에 그려진 유비는 군사적 재능이 그렇게 나쁜 군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릉에서의 실수는 그가 황제에 오를 때까지 열심히 쌓아온 업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촉나라가 제걀량을 필두로 다시 뭉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나, 이는 정말 좋게 해석한 것이지 이릉에서 수많은 장수와 병사를 잃게해 제갈량이 북벌할 당시 인력 난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3. 원균 - 칠천량 해전
우리나라에서 무능한 지휘관 하면 떠오르는 인물 1위는 단연 원균일 것이다. 정말 원균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을 일본의 수중에 떨어뜨리게 만들 뻔한 어마어마한 실책을 저질렀다. 정말 역사상 다시는 절대 나와선 안될 인물 1순위이다. 아무리 정예 병력을 가지고 있어도 지휘관 한명이 멍청하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조선 영토를 무참히 공격했다. 한반도 내륙에 상륙해 평안도, 함경도까지 진격을 했다. 다행히 본토에 남아있던 많은 의병들과 무장들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임진년에 시작된 공격은 약 2년동안이나 지속 되었지만, 어찌어찌 버텨내 휴전 협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일본군에게 크게 당한 조선은 수군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쟁 직전에는 제대로된 군대하나 보유하지 않아 패배를 당했으니, 휴전 기간동안 정예수군을 길러나 반도에 상륙하려는 일본 군대를 막아서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군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군주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휴전 당시 명과 왜나라의 종전 협상이 계속 지속되고 있었는데 히데요시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안좋아지는 걸 느꼈는지 빠르게 조선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부산에 나가있던 고니시와 함께 무리하게 다시 조선을 공략하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조선은 3년간 수군 병력 양산을 위해 크게 노력했다. 삼도 수군 통제사인 이순신의 지휘아래 조선은 꽤나 강력한 수군을 완성했다. 하지만, 선조는 백성들에게 선망을 받는 이순신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선조는 결국 말도 안되는 것을 트집 잡아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르게 만들었다. 이순신이 3년 동안 가꿔온 수군에 대한 통제권을 원균이 맡게 된것이다. 현대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에 오른 원균은 이제 왜군이 눌러 앉은 부산 공략이라는 임무를 선조로 부터 받게 된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 1도 없이 이 자리까지 오른 원균은 부산 공략을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화가난 선조는 지원군 5천명까지 보내주면서 부산을 공략하라고 했지만, 원균은 공격 시늉만 할 뿐 부산포 근처도 가지 않고 돌아왔다 이를 지켜본 대원수 권율은 화가나 원균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을 치게 된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 해군 참모총장 조인트를 병사들 다 보는 앞에서 깐것. 원균은 이 광경이 너무 분해서 결국 부산 가덕도로 조선 정예 수군을 이끌고 간다. 하지만 왜군의 기습을 받자마자 병사 400여명을 버리고 도망갔고 도망간 위치가 바로 거제도에 위치한 칠천량이었다.
칠천량에 들어간 조선 수군은 어떤 움직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막강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던 원균은 왜군에 대항해서 어떻게 싸워야 할것인지에 대한 플랜이 전혀 없었다. 이 점을 간파한 왜군이 칠천량을 공략하기 위해서 출전하게 되고, 조선 역사상 아니 한국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전쟁이 그렇게 시작된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조선의 수군 속으로 진입했다. 조선 수군 보다 열세였던 일본군의 작전은 조선 대 함대 속에 빠르게 진입해 진열을 흐트러 뜨려 함선들을 차례차례 파괴 하는 것이었다. 일본 함선이 조선 수군 깊숙히 들어가는데 조선 수군은 제대로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다. 수군이 괴멸되고 있는 와중에도 원균은 아무것도 못하고 수군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칠천량 해역에서 조선군 함선 절반이상이 파괴되고야 나서 그제서야 퇴각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원균도 목숨을 잃게 된다.
원균은 삼도 수군 통제사로서 일본 공략에 대한 그 어떤 플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칠천량에 진을 치게 된 이유도 가덕도에서 패전 후 퇴각 하다가 비를 맞아 실패하고 어찌어찌 흘러가 칠천량에 도달한 것이다. 이 수군은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결정적 승리를 안겨준 정예 병사들이었다. 원균은 조선 수군의 주요 부대를 모두 수장 시킨 꼴인 것이다. 이후 이순신이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복직해 명량에서 승리 할때 까지 조선은 수군이 야예 없던 절망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정말 원균은 조선의 수치이자 다시는 이땅에 나와선 안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 국력 쇠퇴에 큰 몫을 한 지휘관이다.
앞서 언급한 세 인물은 일본 제국, 촉한, 조선 국력 쇠퇴에 너무 큰 공을 세운 적보다 무서운 아군들이었다. 지휘관의 무능이 이처럼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장군이라는 직책은 정말 무겁다. 자신의 오판으로 수만명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치이다. 그렇기에 전장에서의 인사배치는 정말 신중을 기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