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Column

광해군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왕일까?

gyulee0220 2018. 1. 21. 11:57

  광해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군주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일부에서는 세종대왕, 정조와 함께 조선 3대 성군으로까지 좋은 평가를 내리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연산군과 같이 유교 질서를 어지렵혀 폐위 당한 암군이며 조선 멸망의 시발점을 야기시킨 왕으로 평가를 내린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매번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특히, 지금 사드 문제같이 외교로 국가가 시끄러울때에는 뛰어난 외교술을 보여주었던 광해군은 상당히 고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중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끌어 모으는데 매우 적합하다 조선 중기의 임금이라 비교적 사료도 풍부하고,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딱 중간지점에서 재위 했다는 사실도 그의 평가를 더 흥미롭게 한다. 그는 '광해, 왕이 된 남자', '화정' 등 다양한 대중매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광해군의 공과 과를 살펴보며 그가 이런 평가를 받게된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광해군 묘


<광해군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된 이유>

1. 전쟁 영웅, 광해군

  서계적으로 볼때 전쟁 영웅이 국가의 원수 내지는 지도자가 되는 사례는 매우 흔한일이다.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 세계 2차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위에 해당하는 사례는 많다. 광해군 역시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도망갔던 아버지 선조와 달리 그는 조선에 남아 백성들을 다독이고, 의병을 이끌고 왜적들과 싸워나갔다. 선조의 도주로 큰 배신감을 느꼇던 일반 백성들은 광해군을 새로 기댈 수 있는 지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점이 그가 장남이었던 임해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인들이 그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전임자였던 선조와 그의 후임자인 인조가 국가를 전란으로 몰고 갔다는 점은 그에 대한 평가를 더 좋게 만드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 최악의 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 두 왕과 달리 광해군은 전란을 매우 훌륭하게 극복했다. 이런 점으로 보았을 때, 광해군은 군자로서의 덕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광해군의 중립 외교

  외교와 경제는 과거부터 현대까지 지도자를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표 2가지이다. 그런 점으로 볼때, 광해군의 외교술은 다른 왕들에 비해 정말 뛰어났다. 좋은 외교란, 국가가 전쟁의 위기에 도달하지 않게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타 국가와의 교류에서 실질적 이익을 우리가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2개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외교가 어렵고, 그만큼 지도자 평가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점이다. 광해군은 이 두개의 가치를 모두 실현한 왕이었다. 

 광해군 시기엔 조선이 전쟁에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순전히 광해군의 역할이 매우 컷다. 다른 신하들이 명과의 의리를 이유로 후금과의 항전을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저울질 해가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외부적으로는 어떤 쪽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며, 내부적으로는 군대를 모으고 양측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의 훌륭한 외교적 감각은 그가 리더적 역량이 매우 뛰어났던 군주임을 알려주고 있다.


3. 어쨋든 전후 복구에 힘을 쓴 왕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법인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 기간에 처음 시행되었다. 선조대에도 율곡 이이와 같은 학자들 사이에서 대동법 주장이 나왔지만,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영의정 이원익의 강력한 주장으로 처음 시행되었다. 초기 대동법 전파에 관한 연구와 문헌이 많지 않아 당시의 상황을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광해군은 대동법 전파에 수동적이었다고 한다. 일부 신하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광해군은 즉위 기간동안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후원하였고, 국가적 기록물 재간과 보급에도 힘썻다. 광해군은 세자시절 왜적에 살해, 폭행, 강간을 당하는 장면을 직접 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왕이 되어서 전후 복구 사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또한 강성해지는 후금을 대비하여 다시는 이런 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곽을 복귀하고 병사를 충원했다. 광해군은 북방의 성벽을 강화하고 국가적 요충지인 강화도와 남한산성에도 방비를 철저히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 남한산성에서 후임자가...)


<광해군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된 이유>

1. 폐모살제, 광해군 최악의 폭정

  광해군은 자신의 어머니(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세워진 국가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헌법에 의해 통치가 되는 나라이듯 조선을 대표하는 군주가 성리학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점은 충분히 폐위를 당할만한 사유가 된다. 오늘날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탄핵이 되었듯이 인조반정은 충분히 명분이 있었던 행동이다. 

  광해군의 폐모살제는 그의 불안했던 입지에서 시작된다. 선왕(선조)은 그를 싫어 했으나 신하와 백성의 요구로 왕이 된 케이스 이다. 만일 영창대군이 5년만 일찍 태어났거나 선조가 5년만 더 살았더라도 차기 왕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을 수 도 있다. 문제는 이런 점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는데, 신하(정확히는 대북파)는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왕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지속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선왕에게서 물려받은 정통성이 없어 반대파인 서인과 남인에게 왕권을 공격받는 위험이 존재했다. 주변 왕실과 신하들이 틈만 나면 그를 폐위시킬 생각을 하던 와중에 폐모살제는 그에게 최악의 악수로 작용하여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게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궁궐 덕후, 광해군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국을 다니며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민심을 수습하고, 전후 대동법 시행 등 전후 복구를 위해 힘을 썻던 그의 행보다 다르게 이상하리만큼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 집착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창덕궁과 덕수궁을 재건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사저에 새로 경덕궁을 짓고, 인왕산에 인경궁을 짓고 추가로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 건축에 유난히 집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 5대 궁궐 중 경복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해군의 손을 한번 이상 거쳤다.

  광해군은 궁궐 덕후였다. 광해군은 궁궐 공사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걷었고, 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궁궐 건설 자체는 공적인 영역일지 모르나 전쟁 후 의 조선의 상황을 빗대에 보았을때, 광해군의 집착은 점차 사적인 영역으로 번져갔다. 일부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백성이 죽어나가는 장면을 목격한 광해군에게 PTSD가 생겨난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선조에게서 받지 못한 정통성을 찾기위한 다른 방법으로 궁궐 재건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런점으로 미루어 볼때 지도자 역량 중 외교는 충분히 합격점을 받았으나 다른 부분에서는 의문점이 존재한다.


3. 붕당간 갈등의 심화

  광해군은 출신에서 정통성이 많이 낮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하들의 힘을 빌렸다. 특히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한 대북과 손을 잡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광해군에게 큰 힘이 되어준 인물들이 이이첨, 정인홍, 허균과 같은 대북파였다. 광해군 대에 조정은 대북파, 그중에서도 이이첨의 손에 의해 장악되었다. 정권 초 최고의 파트너였던 둘은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서로 권력 투쟁관계로 변화였다. 신하의 힘을 빌려 왕이된 사례에서 흔히 발생 되는 일이다. 조정에는 광해군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이이첨과 대북, 광해군의 즉위에 반대를 했던 소북,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이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는 서인과 남인이 있어 광해군은 고립되었다. 정권 말기로 갈수록 광해군은 레임덕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광해군은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데 어쩃든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북을 견제하고 서인과 남인을 대거 등용하게 된다. 이는 인조반정 성공의 토대가 되었다. 결국 광해군은 붕당간의 대립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아버지인 선조가 더 잘했다.) 이후 조선 후기 300년동안 조정은 서인이 장악된다. 



  광해군은 성군은 아니었지만 명군이었으며, 암군은 아니었지만 폭군이었다. 광해군은 정도전이 꿈꾸던 신하들의 의견을 잘 조율할 줄 아는 조선 국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는 군주가 갖춰야할 또다른 덕목인 사리분별과 시대 판단 능력을 매우 뛰어났다. 유교국가의 군주가 갖춰야할 덕이라는 점수는 낙제점이지만, 현대국가에서 지도자의 지표로 삼는 외교, 경제, 사회 점수에서는 조선 국왕 평균 이상의 능력을 수행했다. 이중 외교는 모든 국왕 중 최고점을 부여 받을만하다. 참고로 조선 국왕들의 능력 평균은 결코 낮지 않다. 그는 분명 능력이 있는 군주였고 21세기에 더욱 가치가 높을 리더였다. 


  그런점과 동시에 광해군은 폭군으로서의 모습도 충분히 보여준다. 폭군의 조건으로 신하와의 반목과 불통, 도덕성 결여 등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모습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광해군은 북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시끄러운 조정을 전혀 수습하지 못했고, 잦은 옥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폐모살제는 광해군 임기 내내 그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했던 폐모를 강행하였고, 능양군, 임해군, 영창대군을 살해하였거나 죽음을 방조하여 민심은 그를 돌아서게 되었다. 결국 이 결정적 실책으로 그는 조선 왕들 중 두번째로 폐위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광해군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왕일까?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긴 어려울듯 하다. 광해군은 자신의 장점인 외교술과 전쟁 군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 광해군 이후 조선 후기 국왕들이 대부분 외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점을 미루어 볼때 그는 능력도 탁월했고, 시대 역시 잘 타고 났다. 하지만, 비운의 왕이었다는 점은 수긍이 간다. 본인의 장점과 시대가 잘 맞아 떨어졌을 뿐 당시 정세는 국내외 모두 극도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세자시절부터 전란의 폐해를 보고 자랐고, 아버지 선조와의 갈등은 그를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광해군은 17세기 세자시절의 활약으로 당시 신하들과 백성들의 엄청난 기대를 받고 등장했다. 재밌는 점은 이런 광해군에 대한 기대는 21세기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국사 시험 단골문제로 어릴적부터 계속 들으며 자라왔고, 현대의 지도자들 역시 한반도의 대치 상황 속에서 외교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광해군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하지만 광해군을 알면 알수록 빛나는 외교에 비해 내치는 실책도 많고 도덕성 역시 결여되어있다는 점이 현대인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준다. 


 우리는 지도자를 선택할 때 최우선에 놓는 가치가 모두 다르다. 누구는 도덕성은 결여되어있서도 능력을 중시하고, 누군가는 다른 정치력보다 도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각자 원하는 사회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점차 사회가 다원화 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이 현상은 더욱 더 가중될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자신에게 딱 맞는 지도자는 찾을 수 없고 앞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 한 우리는 내가 꿈꾸는 사회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그리는 지도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타협해야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지도자에게 요구해야한다. 내가 원하는 생각과 다소 부족한 모습을 지도자가 보인다 하더라도 정치에 대해 등돌려선 안되고, 관심을 가져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절대 소모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으면 한다.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위해서 나의 이상향과 가까운 세상을 만들어 줄 지도자가 누군지 눈 크게 뜨고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