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Column

당신이 알아야할 대한민국사 - 1. 신탁통치 오보사건

gyulee0220 2018. 3. 13. 01:48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부른다면 나는 내 기준 아래에서는 애국자이다. 그런데 요근래 애국이라는 개념이 많이 이상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외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36년간의 식민 통치를 끝내고 정부가 수립되어 지금까지 참 많은 일을 겪은 나라다. 대한민국 애국자라면 대한민국이라는 100년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대한민국 애국자들이 꼭 알아야하는 대한민국의 뒷 역사들을 한번 소개해볼까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 수립, 4.19혁명, 6월 민주항쟁 처럼 교과서에서 들은 뻔한 이야기 말고,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정부의 뒷 이야기들을 해볼까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다운 민주국가가 생기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보자.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감격적인 광복을 맞게 된다. 3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어둠속에서 지낸 조선인들은 이제 긴 터널을 나와 빛을 볼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찼다. 하지만, 불과 몇개월 사이에 광복을 맞은 조선인들은 사상과 종교 등 여러가지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헐뜯게 된다. 정부 수립에 필요한 여러 사상과 이념들이 충돌하면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을 서로 죽이고 헐뜯게 되는 혼돈의 시기를 겪게 된다. 광복 이전과 다름없이 혼란스런 시기를 보내게 된다. 광복 후 한번도에 미국과 소련 군정이 들어와 서로 조선에 대한 통치 방침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지지하며 서로 싸우는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갈등이 지속되자 소련과 미국 그리고 영국이 참가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게 된다. 많은 국민들은 이 회의에 집중했다. 한반도 통치 방식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어떤 결과를 내 놓을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어떤 형식의 정부가 수립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에 매우 중요한 토의였다. 당시 미군정 하에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반도에 분단된 조국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이념에 대한 전쟁에 대한 이유도 모두, 하나된 정부, 하나된 대한민국 수립에 대한 방향성으로 인한 싸움이었다.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고 이 영향을 받아 세워진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기에 우리 민족이 원했던 건 조선을 뒤 이을 새로운 한반도, 한민족 국가 체제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1면에 하나의 기사가 발표된다.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도선 이북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다시 설명하자면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 하나로 한반도는 폭발하게 된다. 당시 한반도에 국민들에게 신탁통치는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개념이었다. 36년이라는 긴 식민통치로 인해 다른 민족에게 다시 통치 권한을 내주는 역사를 반복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 기사 이후 한반도는 반 소련 정서가 아주 짙게 무르익게 된다.

  문제는 이 기사가 오보였던 것이다. 12월 27일엔 아직 모스크바 3상회의가 끝나기 이전이었다. 12월 30일에 실제로 나온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최소한의 기간으로 하며 임시 정부가 주체가 되는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반면, 미국은 10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동아일보의 오보에 정 반대의 결과였다. 미,소,영,중 4개국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5년 후 대한민국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였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오보로 인해 한반도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국민들의 정서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좌우익 충돌 양상이 친탁과 반탁 운동으로 바뀌게 된다. 소련을 앞세운 좌익 진영도 처음에 동아일보의 오보를 보고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좌익 내부에서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던 이들이 상당했다. 그래서 이 오보 이후 중도 좌익 세력이나, 좌익 민족주의 세력들이 이들과 분리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좌익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우익은 아주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된다.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좌익 세력을 "국가를 소련에 팔아먹는 나쁜 세력"이라고 비난하면서 좌익 죽이기에 앞장서게 된다. 미군정 하에서 우익보다 비교적 강했던 좌익 세력이 한순간에 분열되고 꺽여지게 된 사건이었다.

  1946년 서울은 친탁과 반탁세력의 대결 구도로 바뀌게 된다. 좌익 세력들을 소련의 친탁 주장 오보에 수긍하게 되면서 신탁통치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다. 반면 친미, 우익 세력은 반탁을 주장하며 친탁 세력을 공격하게 되었다. 가장 난감해지게 된것은 바로 중도 세력. 중도세력 역시 오보사건 이후 세력이 많이 약해지게 된다. 친탁이냐, 반탁이냐에 대해 많은 갈림길이 생기게 되어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시간이 지난 이후에 김규식은 신중한 입장을 표명했고, 나중에 여운형과 좌우 합작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김성수, 박헌영, 여운형, 안재홍 4인은 4당 코뮤니케를 도출하며 신탁 통치에는 반대하나 3상회의의 결과에는 수긍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이념 전쟁이 친탁과 반탁 운동으로 바뀌게 되고. 중도 세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대한민국 수립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큰 영향을 끼쳤다. 신탁통치 오보 사건을 통해 어쨌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가속화되었 것과 남한 정부 내의 공산주의 세력이 약화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국민들의 정서를 불러일으 켰다. 물론 신탁통치 자체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시간이 지난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평가 가치가 달라 지겠지만, 당시 한반도 국민들에게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건 다소 어려웠던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사건으로 통일 국가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무너지게 된다.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가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일거에 무너지게 된다. 당시 한반도가 비록 좌우 대결이 극심해지게 되고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설마 분단국가가 생기겠냐는 생각이 다수였다. 그러나 오보 사건으로 인해 좌우익 대립은 더욱 극심해지고 양 진영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또한, 둘 사이를 이어줄 중도세력이 크게 약화된것도 분단 국가 발생에 큰 역할을 한다. 결국 오보사건의 가장 큰 피해 층은 중도세력이었다. 오보를 토대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진영과 이에 반대하는 진영의 결집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라 38선 이남과 이북으로 갈린 남한과 북한의 정세가 급변하게 된다. 우익은 자신들의 반대세력에게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좌익 공격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당시 극우 지도자였던 이승만이 자신들의 정적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힘을 얻게 되고, 1948년 대통령 선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된다. 오보사건으로 웃게된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내부에서는 오보에 따라 친탁이 대세가 되었고 이에 반대파 숙청이 더욱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북한내에 존재하는 우파세력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 가능해졌고 김일성을 비롯한 세력의 결집이 도모되었다.

  오보사건 자체가 남북 분단에 큰 역할을 한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분단 자체에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한다. 이미 이전부터 좌우익의 대립은 지속되고있었고, 이를 더 가속화 시켰을 뿐이다. 오보사건이 없었더라도 분단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이 존재한다. 미국과 소련 양국은 이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한반도를 바라보고있었다. 소련들은 남한에서의 좌익 세력의 역량이 우익보다 강하다고 예측해 신탁통치에 반대한 것이고, 미국 역시 남한의 우익 세력 성장을 도모했다는 것이 가장 큰 예측이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누군가의 공작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동아일보의 실수였는지는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동아일보는 국가적 혼란을 야기했음에도 아직까지 70년 넘게 정정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아직까지도 정정기사가 안나는걸로 봐선 앞으로도 쭉 안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가의 혼란을 준것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도 지지 않고 있다. 사과를 하더라도 분명 문제가 있는 사건임에도 그들을 사과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좌우익과 미소간의 손익계산서보다 잘못된 보도와 가짜 뉴스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준 언론의 행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가짜 뉴스로 생산되는 여론은 생각보다 매우 무섭다. 지금처럼 sns로 빠르게 이슈가 전달되는 사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70여년전의 이 사건을 보면 가짜 뉴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해준다. 이 가짜 뉴스 하나가 한반도에 가져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민족의 역사를 바꾼 희대의 오보사건이다. 이래서 늘 그렇듯 우리는 언론 보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할 필요성이 있다. 최근 들어 더욱 언론들의 '일단 쓰고 아니면 말지'식의 행태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 가짜 뉴스로 인한 부당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독자와 시민들의 비판적 의식이 요구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