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정답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삶이 없다면 가족과 보내는 시간, 연인과의 즐거운 데이트, 혼자 즐기는 취미생활 모든 것들을 놓지게 된다. 우리 삶은 힘든 순간도 있지만 기쁜 순간도 무척이나 많기에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이 나의 삶에 위협을 느낀다고 생각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 갑자기 당신에게 칼을 들이 댄다고 생각해보자. 우리 모두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려고 할것이다. 보편적인 행동은 경찰에 전화하여 나를 보고하거나, 그 사람을 힘으로 제압 할 수 있다면 때려 눕힐 수도 있고,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할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타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쉽게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그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근데, 사람이 늘 이성적이지는 못하다. 누군가 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하거나, 혹은 타인의 잘못된 꼬임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걸기도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 주체가 '나'라면 크게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주체가 내가 아닐때다. 대표적으로 '국가'와 '종교'가 주체가 될 때가 있다. 물론 자신의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믿음을 가진 종교에 헌신적으로 신앙심을 표하는 건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근데, 그 일에 목숨이 걸려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세계 1차대전이 한창일때, 유명해진 전쟁 모병 포스터 하나가 있다. 바로 엉클샘이 손가락을 가르키면서 '지금 미군 부대가 당신을 원하고 있다!'라는 문구의 포스터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마스코트 캐릭터인 엉클 샘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도 바로 이 포스터 때문이다. 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은 젊은 사람들을 군대에 모집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당신을 현재 원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인정 욕구도 자극하면서 젊은 사람들은 모집했다. 게다가 1917년 미국은 남북 전쟁 이후 그렇다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전쟁을 낭만적으로 보는 시각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당시 전쟁은 정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남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자원해서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총알 단 한발로도 누군가는 그 총에 맞아 즉사할 수 있다. 수류탄 하나로 일개 분대 전체가 즉사할 수 있으며, 미사일 하나로 수백명이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다. 차라리 총이나 미사일로 즉사하면 다행일 수도 있다. 전쟁의 뒷면은 이것보다 더 치졸하고 더럽다. 태평양 전쟁때 우리나라의 젊은 부녀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고문과 학살이 빈번하게 발생되는 곳이 바로 전쟁터이다. 전시 군사 재판이라는 것을 빌미로 누명을 씌어 지휘관에게 억울하게 즉결 총살 당하는 경우, 주어진 무기를 기반으로 민간인 집에 들어가 강간과 약탈이 자행되는 경우, 극단적 인플레이션의 발생으로 빵 하나를 먹기 위해 이웃간에 폭행과 살해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전쟁터이다.
그렇다면 전쟁은 왜 일어날까? 6.25전쟁 때, 김일성의 적화 통일 야욕으로 한반도에서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믿는 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히틀러의 야욕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과 소련 청년과 민간인들이 죽었다. 당시 소련 군대가 말했듯이 독일군이 7초에 1명씩 죽어나갔다. 히틀러 개인의 야욕 때문에.
슬프게도 우리가 살고있는 한반도는 평화지대가 아니다.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세기 동아시아에 거점을 세우려는 프랑스, 미국으로부터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게 되었고, 대륙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자국 식민지를 만드려는 일본 제국의 야욕으로 인해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이념 전쟁의 전선이 되었던 곳이다. 그 이후엔 한반도에 나타난 독재자의 야욕으로 우리나라는 분단되었고, 전쟁은 어쩌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다만, 지금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
휴전기간이 약 70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현재 사회에 청년, 지도층 모두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6.25 참전 용사 세대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몇분 남지 않았다. 전쟁을 미화한 영화, 소설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쉽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군대에 있었던 시절에 같이 근무했었던 한 부사관도 어쩃든 분단되어 있는 나라에서 통일을 위해 한번 쯤 전쟁이 일어나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던 분도 계신다.
북한이 핵무기,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고 계속 남한을 도발해오고 있다. 3대 세습 정권은 여전히 군비 강화에 힘쓰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북한 국민을 아오지 탄광에 보내고 반대파를 숙청해 가며 계속 자신의 독재 체제를 확고화 해가고있다. 이 꼬라지 보면서 나도 그렇게 다들 화나는거 당연하다. 그렇게 때문에 전쟁 일으켜서 한번 싸우는게 낫지 않겠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정치인은 전술 핵을 도입해서 국지전에서 활용해야된다고 까지 주장한다. 전술핵은 절대 수비적인 무기가 아니다. 전쟁에서 국지전이 일어났을때 활용하는 목적이지, 적에게 긴장감을 심어주거나 국민 방어를 위한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절대 전쟁은 정답이 아니다.
전쟁을 외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을 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결국 전쟁은 지배자들의 야욕 혹은 전쟁 전 상황까지 내몰게 된 정치인과 지휘관들의 실책, 국민들의 폭력성들이 합쳐져서 발생한다. 히틀러와 김일성의 아욕으로 세계 2차대전과 6.25 전쟁이 일어났고, 표트르 3세의 실책으로 7년 전쟁에서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모든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이 그렇다. 나는 역사 덕후다. 그 중에서도 전쟁사에 관해 많이 공부를 해서 자연스레 잘 알게되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케이스다. 강철 재상이라 불리던 비스마르크 역시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면서, 최대한 전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군대의 존재 이유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게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국민의 목숨을 지킬 의무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것이다. 국민의 목숨이 위협 받을때 출동해서 국민을 보호하라는게 군대이다. 그래서 국방(國防)이라는 표현을 쓴다. 미국 국방부 역시 'Department of Defense' 라고 불린다. 시민과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존재한다. 조선의 이순신, 프랑스의 잔다르크가 왜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가? 바로 국가 방어에 성공하고 전쟁 종료를 앞당겨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이 했던 카미카제나 반자이 돌격 같은 전술은 절대 군대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조금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국가, 이념, 종교 중요하지만 우리의 목숨보다는 아니다. 이를 빌미로 전쟁에 당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정말 신중하게 결정해야한다. 또, 전쟁이 정말 코앞에 순간이고 당신이 나이가 젊은 남성이라면 여지없이 군대로 가야된다. 더군다나 당신이 예비군인데 이를 거역하면, 나중에 사형 선고 받을 수도 있으니 무조건 가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상황이 오기 전까지 항상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하자. 그리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전쟁을 일으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과 싸울 수 있다.
존 F 케네디가 말했듯이, 인류가 전쟁을 없애지 않는다면 전쟁이 인류를 없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