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Column
현대적 리더 조건으로 본 조선 왕들의 점수 - 2
gyulee0220
2018. 2. 18. 15:48
<중종>
전임자의 폭정으로 인해 왕이 될수 있었던 중종은 배경이 약하다보니 재위 기간 내내 신하들에게 시달렸다. 특히 중종반정이 참여한 공신들에게 많이 시달렸다. 중종에게 우유부단한 지도자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 배경에 이런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중종은 신하들과 소통하려고 노력 했으나 항상 마지막의 결과가 좋지 못했다. 신하들과 같이 좋은 사회를 만들려 노력했지만 출신이 끝끝내 발목을 잡거나 공신들의 입김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중종을 논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광조이다. 그래도 중종이 단순히 신하들에게 끌려다는 왕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조광조이다. 이황과 이이가 훗날 사림들이 학문적 스승이었다면, 조광조는 정치적 스승으로 남게된다. 임진왜란 이후 벌어지게 되는 조선의 붕당정치 기간에 많은 성리학 정치인들은 조광조처럼 되길 원했다. 그 이유는 조광조가 청렴결백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녔고, 이 성품으로 인해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겪었다. 그가 주도한 정책 대부분은 공신들이 점령하고 있던 조정 혁파였다. 현량과와 위훈삭제 등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에, 중종은 38년이라는 긴 시간을 재임했을때도 불구하고 이전에 왕들에 비해 분명 성과가 적었다. 외부적 요인도 존재했지만 본인의 능력도 다소 부족한 면모를 여러차례 보인다. 조광조나 김안로등 권신을 키운 것을 보면 이전 조선왕들의 신하 중심을 펼치는 것을 보고 많은 부분 따라 할려 했으나 이전 왕들에 비해 조정 장악력은 다소 부족했다.
또한 중종 시기는 이민족의 침입도 많은 시기였다. 삼포 왜란을 비롯해 여진족의 침입도 많았다. 중종 시기부터 국방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면 임진왜란때 입은 피해를 크게 줄일 수 도 있었지만 중종은 이 부분에 대한 대비도 상당히 약했다.
그래도 그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부분은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다는 것이다. 중종 28년, 6살 노비아이가 괴한에게 발이 잘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피해자가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에 시켜 범인을 잡도록 지시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전체적으로 의도도 좋고 열심히는 했지만 성과가 아쉬운 유형의 리더다. 현대 사회에서 자주 보는 리더 유형이다. 사람은 참 좋고, 부하 직원들한테도 친절하고 나쁜짓 하지는 않으나 성과가 다소 아쉽다.
소통능력 C+
결단력 D
도덕성 B+
일관성 D+
열정 B+
결과 C
<명종>
중종 이후에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기간이 매우 짧았고 그 뒤를 이복동생이었던 명종이 즉위했다. 중종은 공신의 힘을 빌렸다면 명종은 외척의 힘을 빌려 즉위했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권력욕이 무척이나 쎈걸로 유명했다. 명종의 즉위 이후 수렴청정을 시작한 문정왕후는 궁중의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문정황후에 대한 평가는 많이 엇갈리지만 그녀는 분명 정치가적 면모만 보였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백성들의 삶을 살펴야 하는 군주가 사림 견제나 권력 강화에만 너무 치중했다는 점이다.
다만 지금은 조선 국왕에 대한 평가만을 포함하므로 수렴청정기간의 명종 치세는 평가에서 제외하겠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실정은 그들의 잘못으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린나이에 즉위한 명종이 둘에 대항하여 어떤 정책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명종 즉위시기를 잘 살펴보면 뛰어난 신하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계속된 사화와 문정왕후, 윤원형의 폭정들로 인해 신권이 많이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될만한 명재상이 단 한명도 없다. 재야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 이황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전임 왕에게 명재상인 조광조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 하다. 그나마 임기 말기에 명재상이었던 이준경을 영의정 자리에 올린것은 칭찬할만하다.
명종은 주로 내시와 어울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내시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이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조울증세를 보였다. 그래서 매번 자신이 총애하던 내시가 바꼈다고 전해진다. 조울증을 겪는 리더만큼 피곤한 스타일도 없다. 신하보는 눈이 없던건 아니지만 재야에 있던 좋은 인재를 데리고 오기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명종 최대의 업적은 국방력 강화다. 명종시기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는데 이준경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 수군 강화에 힘썻다. 훗날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활약에는 명종의 역할이 매우 컸다. 조선 후기에는 변질되지만 비변사를 설치한 군주가 바로 명종이다.
종합적으로 평가해보자면 크게 잘나지도 모나지도 않은 리더다. 그냥 저냥 회사에서 잘 살아남는 리더유형이다. 약간 조울증세가 있어서 부하직원에게 짜증도 많이 내지만 또 기분 좋을 때에는 잘 대해주고 일에 센스도 어느정도 있어서 항상 평균의 결과는 보여준다. 다만 이런 스타일의 상사와 일한다면 큰일은 할 수 없을것이다. 아버지 중종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왕이다.
소통능력 C+
결단력 C+
도덕성 B
일관성 D
열정 C
결과 C+
<선조>
조선의 대표적 암군 선조이다. 사실 선조에 관한 인물 평은 짧게 끝내기 어렵긴 하다. 선조는 재임 기간 중 치세와 난세를 모두 겪은 몇 안되는 조선 국왕이다. 선조 역시 대부분 조선왕들이 그렇듯 적장자 출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서자 출신이다. 명종이 후사가 없이 요절하게 되자 그의 조카 중 가장 총명했던 선조가 왕위를 물려 받게 되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닌 세조였지만, 의외로 조정에서의 파워는 약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 선조의 입김이 약하지 않았던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조정이 연산군의 충격에서 이제는 완벽히 벗어났고, 이황, 조광조 등 유력 사대부의 영향을 받은 사림들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며 서서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조선 중기, 그 중에서도 중종 부터 선조 초기의 조정에는 뛰어난 신하들이 정말 많이 나온 시기 였다. 사림들이 재야로 들어간 이후, 각 지역에서 키운 양반들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온 시기가 중종 시기 였다면, 그 신하들이 조정을 장악하여 활동한 시기는 바로 선조이다. 이이, 정철, 유성룡 등 뛰어난 명재상들이 계속 나왔고, 이순신, 권율 등 뛰어난 무인들도 많이 나온 시기였다. 조선 초 인재 육성 정책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물론, 이후 일어난 양란으로 수많은 인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긴 한다.
뛰어나고 총명한 신하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자 반대 급부로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붕당 정치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다. 지금으로 치면 꽤나 진보적인 주장을 했던 정여립이었지만, 늘 그렇듯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상가는 주변의 공격을 받게 된다. 동인이었던 정여립은 석연찮은 모반 모의 협의를 받고 자결하게 된다. 이 사건을 빌미로 서인이었던 정철은 조정에 피바람을 불게 한다. 선조가 암군의 평가를 받게되는 대목도 이 부분에 있다. 그는 정여립 모반사건에 대한 제대로된 수사없이 정철을 앞세워 수많은 동인 세력을 죽이게 된다.
선조는 조정을 버리고 도망쳤다. 물론 전쟁에서 왕이 잡히면 게임 끝난다. 일본군의 목적도 바로 선조 포위였으니 도주 자체에 대해서는 잘못한것이 없으나, 선조의 도주가 비난을 받는 이유가 있다. 그의 도주 작전은 전투적인 작전에 의한 도주가 아닌 살기위한 도주였다. 세계 2차대전 다이나모 작전처럼 설계된 도주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한양 근처에 도달하자 백성들에게 공물을 약탈해가면서 까지 도주를 했다. 또한, 왕위를 왕자들에게 갑자기 줘버리고 자신은 명나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전술적 이점이 있는 평양이나, 일본군이 쳐들어 오기 힘든 함경도 지방이 아닌 의주로 도망친 이유는 바로 명나라 수도인 북경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놓고선 왜란이 끝나자 아무렇지 않게 왕위에 다시 않았다. 참 얼굴이 두꺼우신 분이다.
왕위 계승에서도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임진왜란 도중 큰 공을 세운 광해군이 다음 왕위를 물려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그에게 왕을 물려줄 궁리를 찾게 된다. 물론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옹호하긴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는 점이 바로 선조의 미움으로 부터 살아남다보니 권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게 된 것이다. 큰 공을 세운 광해군을 멀리하고 영창대군에게 힘을 실어준 점은 정말 치졸함의 끝을 보여준다.
재야에 많은 인재를 보유하고도 쓸 줄을 몰랐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칠천량 해전.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복직시켜 조선 수군을 다 말아먹은 빌미를 제공한건 도저히 쉴드 불가다. 정유재란에서 수많은 조선 수군이 물 속에 죽어갔다. 국왕의 쪼잔함 때문에 많은 백성이 죽어나갔다. 정말 군주로써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총평을 내리자면 조선 역사에 남을 암군이다. 뛰어난 신하들을 볼줄 아는 능력도 없고, 아들에 대한 질투, 많은 백성들을 사지로 몰았으며 자신의 안위만 챙긴 군주이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불리는 권력자가 갖춰야할 미덕에 정반대적 면모를 보이며, 백성과 신하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한 왕이다. 선조 초기가 조선 역사상 가장 유능한 인재가 많이 나온 시기라는 점에서 그가 보여준 면모는 더욱 아쉽다. 초기에 있던 약간의 좋은 점을 상쇄하고도 몇배나 큰 악행을 저지른 군주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리더가 가진 안좋은 면모인 우유부단함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단력이 본인의 안위만 생각해서 문제지.
소통능력 D
결단력 C+
도덕성 F
일관성 D
열정 D
결과 F
<광해군>
선조의 차남 광해군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지만, 자신의 형은 왕이 될 자질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이복 동생이었던 영창대군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34살이라는 늦은 나이에도 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의 활약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 그가 왕이 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세자 시절에 한정 지어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에게서 볼 수 없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줬다. 의주로 도망친 왕을 대신해 전국 각지를 돌며 왕노릇을 하며 조선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광해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 재임했던 조선의 국왕이다. 이전의 글에서도 한번 소개한 적이 있듯이, 명군과 폭군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흔히 말하는 조선 전기와 후기 사이에 재임하며 급변하는 사회를 잘 정리한 면을 보이지만 이와 반대로 도덕성 부분에서 많은 마이너스를 지닌 왕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국가이니 만큼 리더가 자신의 동생과 어머니에게 저지른 폐륜은 분명 리더로서 안좋은 면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실리주의자적인 면보를 보이는 광해군은 이전에도 말했듯 현대에 더욱 각광받을 리더 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목표지향적 성향을 보면 한편으로는 과거의 행보를 문제 삼아 언론에서 그를 많이 공격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광해군은 실책도 많이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대동법 시행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물론, 대동법 시행이 광해군 대에 시작된 것은 맞으나, 신하들은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확대하자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반대했다. 또한, 전후 어려운 조정 상황을 생각하지도 않고 무리하게 궁궐 증축 공사를 실시했다. 백성둘은 궁궐 공사를 위해서 노역을 나가고, 세금을 바쳐야 했다. 폐모살제에 대한 부분은 다들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런 점들로 볼때 그와 비슷한 현대적 리더는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생각난다. 리처드 닉슨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냉전 체제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도 하면서 큰 외교적 성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광해군 역시 중립 외교를 통해 조선의 안위를 지키며 전쟁으로부터 비껴가게 되는 외교적 성과를 이뤘지만, 자신의 권력을 위해 폐륜적 행동을 했다. 권력 재임 당시에 정말 최악의 인기를 달렸으나 현대에 오면서 부터 서서히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두 리더가 많은 부분 닮았다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두 리더 다 알아둬야 할 점은 조선과 미국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준 것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
광해군은 전반적으로 평가하기가 참 애매하다. 대동법 사례를 보아서는 신하들과 소통능력이 매우 떨어져 보이기도 하나, 강홍립과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신하를 다루는 능력과 통찰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후 복구에 대해서 썩 잘 처리하지는 않았으나, 선조나 인조처럼 결정적 실책으로 나라를 전쟁에 빠뜨리지는 않았다. 난세를 극복했다기 보단, 잘 넘겼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유부단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으나 꽤나 정명공주나 영창대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안의 면모를 보인다. 결국 이런 점들이 인조반정으로 이어져, 광해군은 왕위에서 쫒겨나게 된다. 도덕성 부분에 있어서는 조선 역대 왕들 중 최저점이다. 명심하자. 리더에게는 도덕성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소통능력 C
결단력 B+
도덕성 F
일관성 A
열정 B+
결과 D
<인조>
광해군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왕족들을 최대한 배척했다. 그 중 선조의 후궁에게서 나은 자식은 정원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광해군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궐에서 쫒겨나게 된다. 결국 그는 홧병으로 죽게 되었고, 그 과정을 지켜본 그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잡게 되었고, 그가 바로 인조다. 대의명분의 명확했던 중종반정과 달리 인조반정은 그에 비해 명분이 많이 약했다. 광해군의 폭정은 연산군에 비해서는 크지 않았고, 인조의 복수심이 반정에 많이 반영 되었기 때문이다.
인조와 손을 잡은 서인들은 반정을 일으킨 명분 중 하나로 광해군이 아버지의 나라인 명나라를 저버리고 후금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왜 자신들에게 충실했던 광해군을 내쫒았나며, 인조를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인조는 명나라로부터 인정받기위해 어마어마한 조공을 바치게 되었고, 즉위한지 3년차가 될 때 명나라로부터 왕위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불안한 왕위를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괄의 난. 반정공신이었던 이괄은 흥안군을 내세워 한양을 함락하는데 성공하고 3일동안 도성을 차지한다. 물론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인조가 초기에 얼마나 불안한 왕위를 유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조는 조선을 두번의 전란에 휩싸이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그는 전란의 시대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외교적으로 옳은 목소리를 내는 신하들을 멀리하고, 인조반정때 참여했던 공신들과 함께 권력을 유지하는데에만 급급했다. 그나마 반정 공신 중 최명길과 같이 뛰어난 재상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정말로 병자호란때에 끊겨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반도 역사상 두번째로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한 장본인이다. (첫번째는 당연히 경술국치) 명확한 외교적 노선 수립 없이 친명 정책만을 고수하다가, 청나라 군대가 한양 코앞까지 오고도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인조에 대한 인물 일화로는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무려 8년간 타국에서 생활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이 선조 대신 백성들을 다독인것과 같이, 소현세자 역시 도망간 인조를 대신해 백성들을 다스렸다. 삼전도에서 머리에 피가 나며 청의 황제에게 절을 했던 인조와 달리 8년간 청에 있으면서 청나라와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신문물도 많이 경험했으며 인기가 좋았던 소현세자는 인조의 정적으로 떠올라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선조가 그랬듯이 인조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왕위를 물려받았던 광해군과 달리 소현세자는 의문이 많은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은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그 결과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졌으나, 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소현세자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이미 보장된 상태였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이런 이유로 점차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서를 보고있자니 정말 한숨만 나오는 왕이다. 그나마 재위 초기에 있던 치적이 있는 선조에 비해 인조는 칭찬해줄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 무능함으로만 따지면은 연산군보다 최악의 왕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조선 3대 암군이라고 불리는 세 사람을 비교하자면 연산군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영역까지 가져와 문제가 되었고, 선조는 국가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암군이었다. 이에 반해 인조는 정말 정책 노선이 없는 왕이었다. 교과서에서 흔히 주장하는 친명배금정책은 인조 반정에 참가한 서인들의 정책이지 인조의 정책이 아니다. 인조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도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린적이 없다. 상사로서 비전도 노선도 없고, 결단력도 없는 최악의 군주. 어찌보면 현대에 제시했던 공약들을 반대로 뒤집고, 이행하지 않는 요즘 정치인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쉴드 영역 제로의 최악의 군주. 당연히 평가 역시 최악이다.
소통능력 D
결단력 F
도덕성 C
일관성 F
열정 D
결과 F
<효종>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를 대신해 그의 동생이었던 봉림대군이 인조 다음에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아버지가 청나라에게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자라며 국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위후에 북벌론을 내세우며 조선의 국방력 강화에 힘썻다. 하지만, 효종의 북벌 목적은 실제로 청나라를 치려는 것보다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일종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효종이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서서히 조선을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점으로 보아하면 청나라를 벌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지는 않았을듯 하다. 승산이 없을 뿐더러 또 다시 국가를 전란에 빠뜨리는 짓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형인 소현세자와 같이 청나라에서 지내며 청의 강함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더욱 잘 알았다.
효종의 목적은 전후복구였다. 아버지가 벌여놓은 많은 미친짓들을 수습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 시행. 방납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효종은 김육의 의견을 수립해 대동법을 확대해나갔다. 전후 복구를 서서히 해 나가면서 점차 민심을 회복해 나갔다. 그리고, 당대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던 송시열을 등용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물론, 송시열의 이후 행보는 보는사람들에 따라 극명히 평가가 갈리기는 한다. 어찌되었건 효종은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데려오는데 큰 힘을 썻다.
효종에게 북벌은 일종의 무기였다. 어쨋든 자신도 인조의 아들이었고, 지지기반 역시 서인이다. 둘다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실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잘못은 청나라에 돌려야했고, 이를 위해서 북벌을 주장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친청파였던(정확히는 친청파였을 확률이 높았던) 소현세자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도 조정 내에서 권력이 없던 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조정 내에서 그와 같은 노선에 서줄 사람이 없었다. 효종은 전후 복구에도 힘썻고 왕이 보여줘야할 좋은 모습들을 고루 갖췄다. 인조 뒤에 즉위했다는 약했던 조정 내 지지기반도 잘 극복해나갔다. 무너져가는 조선을 세워가고 삼전도의 충격을 비교적 잘 벗어나게 만든 왕이다. 큰 실책을 일으키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여 잘 정치를 했다.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역사를 보다보면 알 수 있듯이, 실책없이 잘 자신의 재임 기간을 넘기고 조선의 중흥까지도 신경 썻다는 점에서 효종은 충분히 높이 평가 받을 만한 군주였다. 조선의 문제는 효종이 물러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소통능력 B
결단력 B
도덕성 C+
일관성 B+
열정 A
결과 B+
<현종>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가 갑작스럽게 병사하게 된다.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재임 기간을 거친 효종에 뒤를 이허 15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비였던 자의대비의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효종은 국왕이었지만 장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자의대비는 상복을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과 그래도 국왕이 죽었기 때문에 3년간 상복을 입어야된다는 주장이 서로 맞붙게 되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1년 상복을 주장하고,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과 일부 서인 세력들은 3년 상복을 주장했다. 결국 현종은 1년설을 채택하게 되었고, 승자는 서인이 되었다. 단순한 상복 논쟁이지만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이는 큰 문제였다. 전임 국왕이었던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으로 윤선도등 많은 사대부들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인과 남인의 공존체제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고, 송시열이 조선 조정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게 되는 역할을 했다. 당시 현종은 15살의 어린 나이었으므로 크게 조정에서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진짜 문제는 15년 후에 일어난다.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아직도 조정에 살아있던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죽음에 대해 몇년간 상복을 입어햐 하는가가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인선왕후 역시 정확히는 둘째며느리이다.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민희빈 강씨가 첫번째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빈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예법으로 첫째 며느리는 상복을 1년 입어야 하고, 둘째 며느리는 상복을 9개월 입어야 한다. 현종은 역적 강씨를 대신해 자신이 어머니가 첫째 며느리가 됐으므로 1년 상복을 주장했다. 하지만, 송시열을 1차 예송논쟁때의 판례를 들며 9개월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강직하기로 소문난 송시열이 굽힐리 없었다. 결국 현종과 남인이 주장한 9개월이 채택되었으나 송시열과 주요 서인 세력은 기세가 꺽였다. 현종은 자신의 어머니의 정통성 문제도 있었지만, 송시열과의 조정에서의 파워 게임에서 지기 싫어 했던것으로 보인다. 결국 송시열을 조정에서 쫒겨나게 되었고, 잠시나마 남인이 조정의 중심으로 오게 된다.
재밌는 점은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2개월 후에 현종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참 시대적 운도 타고난 인물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은 숙종과 그의 신하들간의 일이므로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너무 정치적 스토리가 많은 현종대이지만 그의 치적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광해군부터 시작된 대동법을 호남 지방까지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청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채택되고, 서양의 문물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 억류당한 시기도 바로 현종대이다. 전임자인 아버지보다는 아니지만 재임 기간 나름 조선을 위해 힘썻다. 다만 30대가 되며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서서히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며 정치적 수완을 벌이려던 차에 급사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상당히 힘들다. 어찌되었건 참 존재감이 없던 조선 왕들 중 한명이다.
소통능력 C+
결단력 C
도덕성 B
일관성 C
열정 C+
결과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