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역사 전쟁 이야기

효명세자, 조선 왕실의 마지막 희망

gyulee0220 2019. 11. 3. 22:50

복원된 효명세자 어진



조선 말기, 조선 왕실에 탄생한 마지막 희망


VS


정통성과 외모로 과대 평가 받고 요절한 거품형 군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급속도로 병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노론 벽파와 시파의 싸움이 지속되었다. 정조가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쳐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힘이 없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매우 약한 왕이었다. 노론 벽파 세력은 사사건건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며 부패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했다.


  평소에도 과로로 건강이 안좋은 정조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순조가 즉위했다. 그리고 1812년 순조의 왕비 순원숙황후의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된다. 왕비 소생 세자가 드디어 왕세자로 책봉 된 것이다. 아버지 순조 역시 후궁의 소생이었다. 숙종 이후로 오랜만에 왕비 소생이었던 왕세자였기에, 그는 엄청난 정통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 정통성을 바탕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조선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 바로 이 왕세자 였던 것이다. 그가 바로 효명세자이다.


생애 및 업적


  • 1809년 9월 18일 순조와 순원숙황후 사이에서 출생 (출생지 : 창덕궁)

  • 1812년 7월 왕세자로 책봉

  • 1817년 3월 성균관 입학

  • 1819년 3월 경희궁에서 신정왕후 조씨와 가례를 올림

  • 1827년 2월 순조에 명에 따라 대리청정시작

  • 1829년 사문조영 간행

  • 1830년 6월 25일 20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사망


창덕궁 대조전




주요 활동 


  앞서 살펴본 것 처럼 효명세자의 삶은 매우 짧았다. 겨우 20년동안 이 세상에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컷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효명세자에게는 출생하자마자 조선을 살려야 한다는 엄청난 특명을 떠안았다. 왜 그가 이런 운명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그의 출신 성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정통성에 항상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정통성 문제를 따지기 시작하면 조선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은 유교 국가인 만큼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그리고 적자와 서자의 관계가 매우 철저한 국가다. 일반 가정에서도 적자와 서자의 영향력을 천지 차이인데, 조정에서 적자의 힘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 조선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책이기도 하면서 위험한 정책이 있었는데, 그것 이 바로 수렴청정과 대리청정이다. 일단 두 제도를 간략히 설명하면 수렴청정은 너무 어린 나이에 국왕이 즉위해서 그가 국가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판단 될 때 대왕대비처럼 왕실에 가장 큰 대비 어르신이 대신 통치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대리청정은 국왕이 고령이나 건강상의 문제로 국가를 다스릴 능력이 떨어질 때, 왕세자가 국가의 운영을 대신 지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제도가 조선 초기에는 비교적 잘 맞아 떨어졌다. 대표적인것이 세종의 대리청정으로 문종이 6년간 국가를 운영 했던 시기에 조선의 과학 기술이 매우 발전된 사례가 있었고, 선조의 대리청정으로 광해군이 있을 당시 임진왜란을 잘 지휘하며 국가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에 오면서 이 두 제도가 비이상적으로 운영 되었다. 영조는 말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무려 14년간 대리청정으로 세웠는데, 이 14년 동안 사도세자가 실제로 국가적 결정을 내린 업무는 그리 많지 않다. 말로만 대리청정이었을 뿐 실제로 정치는 영조가 계속 하고 있었다. 

  문제점은 영조에 이런 비이상적은 국가 운영이 사도세자와 정조의 정통성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사도세자 역시 효명세자와 마찬가지로 왕비의 소생이었기에 아주 뛰어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통성을 지닌 왕세자의 아들 세손까지 (훗날의 정조) 이들이 가진 파워는 엄청났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며, 자신의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고 세손을 역적의 아들로 만들며 스스로 정통성을 낮췃다. 그 결과 정조와, 후궁 출생인 그의 아들 순조, 그리고 순조 초기에 있었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까지 합해서 이 3대 동안 왕권은 크게 떨어지고 신하의 힘이 크게 올라가 세도 정치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이 세도정치가 극심해질 기간에 순조의 왕비 소생의 효명세자가 태어나면서, 그는 세도 가문을 혁파할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송논쟁 기간 동안 숙종이 수많은 신하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정통성에 기이한 것이다. 효명세자는 그저 출생만으로 조선 조정의 희망이 된것이다. 그가 4살이 되자 빠르게 왕세자로 책봉하며 훗날 그가 왕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준비작업을 마친다.

  아버지 순조는 매우 무기력한 왕이었던, 정조가 너무 이른나이에 승하하는 바람에 그는 11살에 왕위에 오르는데, 이는 어린 임금의 대명사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었다. 곧바로 영조의 마지막 왕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나, 그녀는 위기의 국가를 운영할만한 그릇은 되지 못했다. 천재형 군주 정조가 있을 때는 조용히 있던 신하들이 점차 파워가 강해지게 된다. 특히 전시에 만들어져 국가 최고 결정 기구 노릇을 하던 비변사의 기능이 더욱 세지며 세도가문의 힘은 점차 강해진다. 삼정의 문란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신하들은 자신의 세력 불리기에만 힘쓸뿐 백성들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에 백성들의 힘을 모으고, 천주교민을 박해한 신유박해, 지역 차별에 분노한 반란 홍경래의 난 모두 순조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말그대로 헬조선이 열리던 시기가 순조 재임기간이다.


  조선 조정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효명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컷다. 순조는 어릴 때 부터 건강이 매우 안좋았고, 국왕이 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채 왕이 되 무능력한 통치를 계속 이어갔다. 반면, 효명세자는 어릴적부터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안동 김씨였던 김조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순조는 그를 견제하며 효명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풍양 조씨 가문의 유력자 조만영을 효명세자의 장인 어른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이것은 순조의 엄청난 실책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효명세자가 17세가 되고, 건강이 나빠진 순조는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짧디 짧은 4년간의 효명세자의 정치가 시작된다.


  보통 대리청정을 시작하면 신하들이 조정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며 다시 왕이 복귀해달라고 간청을 한다. 하지만, 이때는 달랐다. 순조가 이미 스스로 여러차례 신하들에게 대리청정에 대한 귀뜸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의 건강 상태를 보아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미 효명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에 신하들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두팔벌려 환영했다. 

  청년 효명세자는 단호한 일처리로 많은 신하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장인 가문인 풍양 조씨를 비롯한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대거 등용했다. 심지어 소론 계열 인사까지도 적극적으로 조정에 복귀 시켰다. 학구열이 높은 사대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행사를 자주 개최했다. 구양수으와 소식의 글을 발췌한 사문 조영을 편찬하며 유교 사상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이시기에 등용된 가장 유명한 인물이 훗날 개화파 사상의 근간을 마련하는 박규수이다. 조부 박지원이 청나라 유학을 가며 서구 문물에 대해 일찍부터 습득을 한 능력을 높게 보고 그를 등용했던 것이다.

  효명세자는 유교 사상 발전 뿐만 아니라 조정 예술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조정에서 진행하는 각종 궁중 행사에도 직접 관여를 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궁중 연회에서 진행한 가무와 조정에서 사용하는 향로도 그의 손길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대규모 연회도 열며 조선 궁중 예술의 발전을 이끌 어 올 뿐만 아니라 아직 왕권이 살아있다는 인식을 신하들과 국민들에게 심어준다.


  그렇게 효명세자의 정치가 시작된지 3년 3개월이 된 1830년 그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차기 국왕을 위헤서 탄탄대로를 걷고있던 그 였기에 그의 급사는 특히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죽기 몇일 전부터 피를 토하더니 그러고 정확히 6일 후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전 부터 건강상 문제가 없었기에 그의 죽음은 많은 의문점이 나온다. 그리고 아버지 순조는 특히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조선의 국운을 이끌어 나갈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효명세자가 죽고 정확히 4년 뒤에 순조도 세상을 떠나면서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게 된다. 헌종과 이후 철종으로 이어지는 약 20년간의 치세 동안 두 왕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 가문은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조선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미 조선의 국운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더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조선 말기, 조선 왕실에 탄생한 마지막 희망


  그를 평가하기엔 그가 국정을 운영한 기간이 너무나도 짧다. 그의 순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3년 3개월의 짧은 기간동안 그를 평가해야 한다. 우선 사료들을 보아 그가 정통성과 능력 2가지를 모두 지닌 뛰어난 군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대리청정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신하들이 환영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는 조정 신하들에게 크게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아버지 순조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다. 보통 대리청정이 원활이 이루어 지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새로운 국왕에 적응하는 걸 두려워 하기에 기성 세력들은 대리청정에 반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여기엔 유교 사상에 기반하여 군주가 퇴위를 할 때 막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생각하는 문화도 존재했다.

  어찌 되었든 순조가 잘한 부분 그리고 동시에 효명세자의 능력이 인정 받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전부터 능력을 인정 받았던 문종과 사도세자 조차도 저만큼의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특히 사도세자때는 신하들이 극명하게 달려 그의 대리청정을 놓고 조정 내에 파벌이 생길 정도로 엄청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효명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등한시 되었던 조정 왕실 자체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 초에 궁중 예복, 예술 등이 크게 발전되었는데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이 부분이 등한시 되었다. 하지만 궁중 연회는 왕권 강화를 의미한다. 효명세자는 궁중 연회 깊숙한 곳 까지 관여했다. 연회에 사용될 가무와 소품 하나까지 신경을 쓰며 등한시 되었던 궁중 예술을 발전 시켰다. 이런 행동은 신하들에게 아직 조선 왕실이 죽지 않았다는 시위의 역할도 존재한다.

  또한 경연을 자주 열며 유교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 천주교의 전파와 동학의 창시로 점차 유교 학문이 백성들에게 크게 어필 되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서 그의 경연은 더욱 더 중요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가 흔들리는 것은 국가의 붕괴를 의미한다. 신하들의 유교적 학문이 깊이를 더욱 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또 뒤어난 인재를 파벌에 상관 없이 적극적으로 등용하며 다양한 인재가 조정에 등장한다. 세도 가문이 잠식한 조정을 깰 중요한 정책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출생 성분도 좋고 능력도 좋았던 유능한 지도자 였던 것은 분명하다. 신하들의 신임도 받는 정말 정치 생활의 출발은 완벽한 군주였다. 문제는 완벽한 스타트를 끊고 곧바로 세상을 떠나 보여준게 없다는 것 뿐이다.



구리에 위치한 효명세자 묘 (수릉)




정통성과 외모로 과대평가 받고 요절한 거품형 군주


  그래서 효명세자가 조선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그마나 할 수 있는 말들이 다양한 인재 등용, 궁중 예술 발전, 경연 중시 등등 인데 명확하게 조선 부활을 위한 아젠다를 내놓지 못했다. 위에 말한 것들은 그저 굉장히 원론적인 얘기들이다. 제정신이 박힌 군주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이다. 문종 처럼 조선 과학 기술 발전이라든지 영조 처럼 탕평책이라든지, 자신만의 정책을 보여주지 못한게 효명세자의 한계다. 

  3년 3개월이 짧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의 재임기간이 5년이다. 3년 3개월이면 자신만의 정책 하나를 펼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효명세자의 업적이라고 하면 나오는 것들이 죄다 정통성과 외모에 관한 이야기다. 존 F 케네디가 이미지 메이킹을 잘 해 리처드 닉슨을 이기고 미국 대통령에 올랐듯이 효명세자는 이미지메이킹에 달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순조의 사전 작업이 빛을 발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하며, 유력한 가문과 결혼을 시키며 비록 자신의 정치는 못했지만 아들의 정치를 위해 힘을 크게 싣어준게 주요하게 작용했다. 순조는 아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견부호자 이미지를 심어주며, 향후 정치에 대비했다. 정조가 자식에게 힘을 주지 못해 자신이 정치 생활이 꼬이게 된 것과 다르길 바르는 그의 사심이 잘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효명세자는 업적에 비해 분명 고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 역사 상 적장자의 아들은 힘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고, 적장자 효명세자는 칼자루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대리 청정을 시작한 셈이다. 조선 왕들은 대부분 칼이 없는 맨손 상태로 시작한다. 칼을 찾기 위헤 신하, 청나라와 싸움을 하는 것 부터가 국왕 정치의 시작이었다. 다른 왕들에 비해 훌륭한 조건으로 시작했는데  그가 고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왕들이 성분이 얼마나 비참했는가. 아버지가 대놓고 배척했던 둘째 아들 광해군, 신하들의 힘으로 간신히 왕에 오른 인조,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 효종, 후궁 소생이면서 심지어 국왕의 아들 도 아니었던 영조, 역적이 아들 정조, 강화도령 철종,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 처럼 한명한명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조선 후기엔 왕세자-국왕 프로세스로 왕이 된 사례가 몇 없다. 그의 출신 자체가 그를 고평가 하기에 충분한 이유다.



효명세자를 다뤘던 KBS 드라마 - 구르미 그린 달빛




총평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효명세자가 보여준 3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유능함 때문에 자꾸만 그가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이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자꾸만 든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조선에게 있어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국왕의 정통성과 능력이 서로 맞물린 케이스가 정말 없다. 정통성 있던 국왕 숙종은 하도 많은 신하를 죽여 조선 후기 인재난에 원흉으로 떠오르고, 유능한 군주 영조-정조는 낮은 정통성 때문에 신하들에게 계속 공격 받았다. 정통성과 능력 모두 받쳐주니까 이젠 건강 문제가 조선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분명 보여준게 없는 지도자인건 분명하다. 하지만, 기대감을 갖기엔 충분했다. 어렸을 때 부터의 총명함 3년간의 정치를 통해 보여준 단호함과 능력들이 기대감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준다. 보여준게 없으니 고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프로야구에서 2군을 폭격한 어린 유먕주를 1군으로 당연히 콜업해야 하듯이 그가 보여준 대리청정에서의 퍼포먼스는 완벽했다. 이제 본 무대에 그를 등장 시켜 본격적으로 능력을 보여줄 시점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를 좋아하던 많은 신하들역시 그가 죽자 통곡을 한 것만 봐도 그렇다.


  효명세자의 21세의 죽음이 아쉽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 인지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