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후, 몽골의 적장 살리타를 사살한 고려의 맹장
여몽전쟁의 전황을 바꾼 고려의 맹장
VS
얻어걸린 승리로 얻은 과장된 명예
1231년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몽골의 대칸 오고타이는 살리타에게 군사를 주어 대대적으로 몽골으로 침공한다. 약 30여년간의 전쟁을 끝으로 고려는 몽골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부마국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고려는 무려 1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130년의 기간 동안 몽골은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히고 국력은 심각하게 나빠진다.
여몽전쟁에서 고려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고려의 영토 전역에 몽골군이 샅샅히 침입했고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패전을 거듭했지만 의미없는 승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몽전쟁 기간 중 고려에 가장 기념비적인 전투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처인성에서의 승리였다. 고려는 이 곳에서 역사에 기록될 멋진 승리를 거두었고, 그 중심에는 고려의 승려 장수 김윤후가 존재했다.
주요 활동
출생년도 미상, 고려 양광도 용인 출신(현 경기도 용인시)
1232년,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적장 살리타 사살
1232년, 고려 조정으로 상장군에 임명되나 거절
1253년, 충주 방호별감으로 있을 당시 포위된 성을 사수하는데 성공
1253년, 조정으로부터 감문위 섭상장군으로 임명
1259년,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 몽골에 함락
1262년, 추밀원 부사로 임명
1263년, 수사공 우복야로 임명
사망년도 미상
처인성 전투 상상화
생애 및 업적
1932년 몽골의 1차침입당시 고려의 수도 개성은 삽시간 안에 함락당한다. 조정은 막을 달리 막을 도리가 없었고 고려는 몽골과 강화 협정을 맺게 된다. 몽골 역시 너무 먼길을 원정 온 탓에 충분히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몽골은 고려의 왕족 한명을 인질로 잡아가면서 일시적으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돌입한다.
몽골이 재차 고려를 침입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최우를 중심으로한 무신 정권은 몽골의 2차침입에 대비했다. 근데 최우가 침입에 대비한다는 것이 고작 강화도 천도였고 최우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부 숙청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정권의 안위만을 생각해 섬으로 도망쳤고 한반도에 남은 시민들은 조정으로 부터 버려진채 스스로 힘을 모아 몽골의 대군을 막아내야만 했다. 그나마 삼별초를 조직해 몽골과의 전쟁을 대비했지만, 몽골의 군대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몽골의 대칸 오고타이는 살리타에게 지시해 다시한번 고려의 침입을 지시했다. 첫번째와는 달리 고려에 대한 경험도 있던 살리타는 고려 정복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지난번 침입이 일어난지 정확히 1년 뒤에 살리타는 다시 한번 압록강을 넘게 된다. 친원파이자 매국노인 홍복원에 도움으로 살리타는 손쉽게 서경을 함락시키고 2달여만에 다시한번 개경에 도달한다. 개경에 왕과 최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살리타는 선택지에 놓이게 되는데 강화도로 건너가 고려 국왕을 잡아내던가, 고려 국토 전체를 불태우며 국왕이 스스로 강화도에서 나오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살리타는 후자를 택하고 개경에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11월 한양을 함락하고 현재의 경기도 남부 지역까지 도달한다.
그러다 살리타는 광주성에 도달하게 되는데 광주성은 식량도 풍부하고 성곽도 튼튼해 함락시키기 쉽지 않았다. 지난번 침공때 귀주성에서 당해본 경험이 있던 살리타는 광주를 포기하고 더 남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마주한 성이 바로 처인성이다.
처인성은 겨우 둘레 400미터의 아주 작은 크기의 토성이었다. 오히려 성보다는 요새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작은 성이다 보니 정규군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승려 김윤후가 용인의 백성들을 끌어 모아 몽골의 침입에 대비했다. 사실 몽골 입장에서 처인성은 함락할 필요도 없는 전투였다. 너무 작은 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큰 가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살리타가 처인성을 공격한 이유는 2가지가 있는데, 우선 처인성의 군량 창고였다. 먼길을 온 몽골군 입장에서는 많은 군량이 필요했으므로 처인성에서 군량을 확보하기를 바랬다. 또한 살리타가 광주성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지척에 있던 용인 백성들은 이미 도망을 간지 오래라 용인 지역에서 전리품이 매우 빈약한 상황이었다. 의미없는 용인 정벌에 살리타는 약이 올랐고, 처인성에 있는 병사들에게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살리타는 병력을 세개로 나누어 빠르게 처인성을 포위하고 토성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했다. 이에 대비해 김윤후는 성을 수비하기 위해 저격수 위주로 병력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 작전을 빛을 발했다. 살리타는 작은 처인성을 쉽게 함락할 것이라 생각하고 얕잡아봤다. 하지만 전쟁에서 방심은 가끔 말도 안되는 이변을 가져온다. 바로 처인성의 총사령관이었던 승려 김윤후의 화살이 살리타의 머리에 적중한것이다. 살리타는 그대로 쓰러졌고, 처인성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고려의 승려의 손에 몽골군 최고 사령관이 쓰러진것이다.
대장을 잃은 몽골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뿔뿔히 흩어진다. 몽골군의 시나리오에 살리타의 죽음은 전혀 없었다. 결국 몽골은 고려와 허겁지겁 강화를 맺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김윤후의 화살 하나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몽골의 명장 살리타를 필두로 여몽전쟁을 끝내려던 몽골의 계획은 김윤후의 화살 한발으로 그 시기를 다시 뒤로 늦출 수 밖에 없었다. 몽골의 2차 침입을 혼자의 힘으로 막은 김윤후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장군 직위를 하사받게 되지만 본인이 스스로 거절하게 된다.
김윤후는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처인성에서 대승을 거둔 뒤 21년이 지난 1253년 그는 충주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다. 김윤후는 다시한번 몽골군을 상대로 충주성에서 70일간 혈투를 하며 버텼다. 이때도 조정의 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시민군을 조직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김윤후는 백성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관청에 있는 노비 문서를 불사르면서, 벼슬을 하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김윤후의 이런 노력은 다시 한번 빛을 봤고 몽골을 상대로 또 다시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당시가 몽골의 다섯번째 침입이었는데, 충주성에서 또 시간을 허비한 몽골군은 이번 침입 역시 큰 소득 없이 물러나게 된다. 1260년 쿠빌라이 칸과 고려 원종이 협상을 맺어 내정을 간섭받게 되는 부마국으로 전락하며 간신히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나게 된다. 이후 김윤후는 1262년 추밀원 부사를 지내고, 1263년 수사공우복야에 올랐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이상 문헌에 나오지 않게 된다. 따라서 정확히 그가 몇년도에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 당시만 하더라도 고령이었다고 추측이 되므로 더 오래 살아있었을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처인성 터
얻어걸린 승리로 얻은 과장된 명예
사료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시간은 아니므로 그가 살리타를 죽였다는 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선 따로 말을 하진 않겠다. 고려 자체가 워낙 역사가 짧고 사료도 전쟁으로 소실되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당시 역사적 사실들이 진위 여부가 불명확한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렇기에 그가 살리타를 실제로 죽였는가는 이 글에선 소모적인 논쟁이므로 지나치자. 다만, 이 사실이 다소 신빙성이 떨어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고려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들은 주로 민간설화에 기반을 둘 수 밖에 없다.
전쟁이라는 건 원래부터 우연의 연속이다. 세계 1차대전의 시발점 사라예보 사건만 보더라도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김윤후가 살리타를 사살하기 위해 화살을 쏜 것 역시 우연에 기반된 것이다. 화살을 쏘는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적장이나 적병을 사살하려는 목적으로 쏜다. 그리고 아군 지휘관이라면 적군 장수를 노리고 쏠것이다. 모든 장수들은 적장을 향해 화살을 쏘지만 모두가 성공하지는 않는다. 화살로 적장을 사살하는 케이스는 정말 역사에 손을 꼽을 정도로 적게 발생한다. 당연히 바보가 아닌이상 자기 자신을 적군의 사정거리에 노출 시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즉 살리타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죽을일도 없었다. 김윤후의 화살 실력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나, 어찌되었는 살리타 사살은 우연이 많이 작용 할 수 밖에 없다. 처인성 승리가 고려에 값진 결과를 가져다 주었지만, 화살 한발로 전황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리가 없다. 김윤후는 운 좋게 얻은 승리로 과분한 명예를 누린것이다. 처인성에서 그저 몽골에 천운이 없었고, 고려에 천운이 있던것 뿐이다.
그리고 김윤후는 정규군이 아닌 승려다. 그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 역시 정규군 장수가 아닌 것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런 시민군 장수들의 활약은 와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간 설화에 중점이 되어 인물을 서술 하게 된다. 민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꼭 진실만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패전에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므로 그의 활약은 한번 곱씹어볼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민간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점차 그의 공이 과장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충주성 전투 당시에는 고려 조정으로 부터 직위를 하사받게 되는데, 이 당시는 고려가 정상적인 국가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다. 조종에서 높은 직위를 하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여몽전쟁기에 고려는 정말 유능하다는 인재들은 전부 사망한 상태였다. 인재 풀에 씨가 말랐을 시점이다. 이 시기에눈 조금만 전쟁에서 활약한 장수가 있다면 곧바로 직책을 하사했다.
그렇기에 김윤후가 지금 받고 있는 존경과 명예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존재한다. 민간 설화를 기반으로 역사적 인물을 판단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은 단군 왕검이다. 과연 단순히 그의 힘만으로 두번의 몽골이 침입을 막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2차 침입때는 징기스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 먼길을 온 몽골 군이 다시 한번 정비를 위해 후퇴를 한 측면도 존재하고, 5차 침입 당시에는 더이상 고려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어 불필요한 군사적 소모를 줄이기 위한 측면도 존재한다.
충주산성 터
여몽전쟁의 전황을 바꾼 고려의 맹장
전쟁에 변수를 불러일으키는 능력도 실력이다. 400미터 남짓한 조그만 처인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수비측에서 선택할 방법은 많지않다. 말그대로 처인성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인 것이고 적군을 막아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적장을 사실하는 것이다. 김윤후는 이를 위해 저격수를 배치했고 그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살리타를 사살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의 지휘관이라면 변수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김윤후가 활약했던 두 곳 처인성과 충주성 모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은 아니지만, 이 전투를 통해 전황이 완전히 뒤바꼈다. 여기엔 몽골군의 쓸데 없는 고집도 한 몫을 했지만, 어찌되었건 수비측은 최선을 다해 수비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성이었지만 이 두 곳을 멋지게 수비해낸 김윤후에게 어찌 누가 비난을 하겠는가. 전문적인 군사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뛰어난 전략을 준비했고, 몽골은 그의 전략에 두 차례나 무릎을 꿇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기본 실력 없이 성곽에서 정확히 적장을 사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 전에서도 저격수 한명이 전장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이때는 13세기다. 13세기 처인성에서 벌어진 농성전을 상상해보자. 토성이었던 처인성 앞에 몽골군을 말을 타거나 병사들이 성곽을 향해 달렸을 것이다. 이런 토성 앞에서는 몽골군의 움직임으로 성곽 앞은 엄청난 양의 모래 바람이 휘몰아 쳤을 것이다. 김윤후는 흙먼지 사이를 뚫고 적장의 머리를 맞췄을 텐데 이는, 보통 활 실력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연막탄이 터진 상태에서 정확히 적의 얼굴에 총알을 쏜 것이다.
그리고 사료가 불명확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쨌든 고려사에 기록된 명백한 사실은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가 죽은것과 이후 몽골군은 황급히 고려를 빠져 나왔다는 이 두가지이다. 김윤후가 살리타를 설령 죽이지 않았더라도 김윤후의 부하 병사 중 한명이 그를 사살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만약 그랬다면 김윤후의 저격수 배치 작전에 제대로 먹혔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의 공이 매우 큰 상황이다. 어느쪽으로 보나 김윤후의 처인성에서의 공을 폄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충주성의 승리 역시 대단하다. 몽골군의 공격으로 부터 성을 70여일간 지키고 지친 몽골군이 결국 충주성을 포기했는데 이는 몽골에 무릎을 꿇은 다른 유라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대단한 성과다. 몽골이 충주성을 고집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처인성때와 마찬가지로 내무적으로 군량이 바닥 났거나, 해당 성에서 반드시 얻어야할 무언가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전쟁의 지휘관이 가져야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적의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다. 적이 충주성을 고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한 능력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을 할 때 마지노 선을 피하기 위해 벨기에 국경으로 돌아가 전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 이와 같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충주성을 함락하지 않으면 몽골군은 더이상 남하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 곳을 고집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작전이 실패하자 몽골군은 다시한번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게다가 충주성 전투 당시에는 김윤후는 정규군 소속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직책을 활용해 멋진 계책을 내놓는 데 바로, 전쟁에서 활약한 노비들의 노비 문서를 태우고, 백성들에게 벼슬을 하사하며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이다. 처인성의 승려 김윤후가 저런 계책을 내놓았다면 큰 효과가 없었겠지만, 국가의 녹을 받는 장수 김윤후의 계책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더군다나 저 당시는 13세기다. 저 시기의 장군이 저런 진보적 생각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전쟁과 사회를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몽골군
총평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 그의 전략들을 보면 수비측 지휘관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잘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각 상황에 맞게 최적의 효율을 내는 전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능력이 정말 수준급이다. 나쁘게 말하면 권력 남용이지만 확실한 논공행상을 통해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능력, 적군의 행동을 제어하고 약점을 파고 드는 능력, 전쟁을 전투 하나만 보는게 아닌 숲을 보는 능력 등 지휘관이 갖추어야할 이상적인 모습을 전부 타고났다.
그가 고려 시대 그 중에서도 여몽 전쟁기에 태어나지만 않앗더라면 정말 국가적인 영웅으로 까지 추대 받았을 지도 모른다. 여몽 전쟁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못지 않은 국가적 위기였다. 이 시기가 현대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 것은 두 전쟁보다 400여년 가량 과거의 일이고, 사료가 부족한 고려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없던 사료 마저 몽골이 전부 태워버렸기에 후대까지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못한 측면이 존재한다.
앞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을 적긴 했지만 정말 헛소리에 불과하다. 블로그 양식에 맞춰야 해서 어떻게든 까보려고 했지만, 김윤후의 여몽전쟁 활약은 실로 대단하다. 김윤후는 몽골의 고려 섭정을 수십년이나 늦춘 엄청난 맹장이다. 실력 그의 대부분 활약들이 부족한 사료 인해 전달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어느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그가 후대에 남긴 업적은 너무나도 위대하다. 승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시민군을 형성해서 막은 점은 훗날 많은 의병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기간의 의병들은 김윤후의 활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여몽전쟁 최고의 지휘관에게 어느 누가 나쁜 평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