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만행에 대한 고발
얼마전 여자 월드컵 4강전 잉글랜드와 미국의 경기에서 미국의 주장 알렉스 모건이 역전 결승골을 넣은 후 차를 마시는 세레머니를 했다. 당사자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모션이라고 했지만, 이를 본 영국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레머니가 보스턴 차 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어서였다.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이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영국의 보호무역에 분개한 미국인들이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차를 바다속으로 던진 사건이다.
영국의 애칭은 '신사의 나라'이다. 하지만 후술한 대영제국의 끔찍한 만행을 보면 왜 영국이 신사의 나라로 불리는 지 의문이 생긴다. 전세계에 곳곳에 걸쳐 사람들을 죽이고 못된 짓을 많이한 나라가 저런 애칭으로 불리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대영제국의 전세계를 돌며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한번 알아보자.
아일랜드 대기근
1847~1852년 대영제국 빅토리아 시대에 발생한 이 사건은 아일랜드 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심어준 사건이다. 당시 아일랜드의 주식은 감자였다. 아일랜드는 토지가 척박해 작물이 기본적으로 잘 자라기 어려웠다. 이때 아일랜드에 감자가 전래되었고, 척박한 토지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는 쉽게 아일랜드 인들에게 주식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감자 생산량은 급등하고 아일랜드의 인구도 급증하게 되었다.
1801년 아일랜드가 브리튼 연합으로 합병되면서 영국인들에게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아일랜드의 빈민에 대한 처리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인구 4분의 1이 총 영토의 86%를 차지할 만큼 아일랜드의 빈부격차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일랜드는 영국인 지주들이 아일랜드인 소작농을 고용해 밀과 옥수수 같은 고급 작물은 영국으로 이동했으며, 값이 싼 감자만이 유일하게 아일랜드 본토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와중 미국 동부에서 감자 역병이 발생해 감자 재배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 역병균은 온도와 습도 조건만 맞으면 작물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 모든 감자들을 전염시켰다. 그리고 1845년 아일랜드에서도 감자 역병이 발생한다. 그래도 기근 첫해에는 영국인들도 아일랜드 대기근에 관심을 가지며 싼값에 아일랜드에 밀 공급을 진행하는 등 구조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다음해 자유당이 집권하게 되자 상황이 바뀐다. 이들은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며 곡물법을 폐지하고 아일랜드에 대한 구조 활동을 멈춘다. 게다가 기근으로 인해 세금을 내지 못하는 아일랜드 인들은 쫓아내고, 아일랜드 전역은 빈민들로 가득 차게 된다. 영국인들은 눈앞의 아일랜드인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같은 영연방 국가였던 아일랜드에 어떤한 원조도 하지 않게 된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의 인구는 800만명에서 400만명으로 반 이상 감소하게 되며 3천만명 이상의 인원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사이가 비교적 좋았던 아일랜드와 영국이었지만 이후 아일랜드에서 반영 감정이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편 전쟁
건륭제 재임 시절 청과 영국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청나라에 조지 매카트니를 비롯한 사절단을 보내며 양국간의 우호를 다졌다. 하지만, 청나라가 서서히 혼란을 겪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청나라를 보며 군침을 흘리게 된다. 당시 청은 엄청난 은 생산량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유럽 국가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생산량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다른나라로 부터 무역흑자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와 본국 그리고 청과의 삼각 무역을 통해 청과의 무역 적자를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도의 작물이 청에 예상만큼 수요를 못 가져오게 되었다. 문제는 본국에서 청나라 차에 대한 인기가 상당했기에 청나라 차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올라갔고 이는 영국의 무역 적자를 가져왔다. 대영제국은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만다.
영국 사람들인 인도에서 생산되는 마약 아편을 청나라에 공급하기 시작한다. 당시 아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청나라 사람들은 아편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많은 청나라 사람들은 아편에 중독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고, 청의 아편 수요는 급증한다. 이는 청나라 상류층과 서민층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아편에 중독되어 갔다. 영국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아편의 가격을 올라갔고, 청나라는 엄청난 은 유출을 겪게 된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아편에 빠져 일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한족이 중심이된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며 사회 전반에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청나라 황제 도광제와 부하 임칙서는 정식으로 영국에 이에 대해 항의했으나, 그들은 당연히 청나라의 항의를 무시했다. 결국 청나라가 영국 상선 로열 색슨호를 포격하며 아편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대영제국은 청나라로 부터 홍콩을 할양 받게 된다. 영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청나라 사람들은 마약에 궁지에 몰아 넣고 삶을 파괴했다. 실제로 지배 층 중 아편에 손을 댔다가 쫓겨난 사람도 많았다. 서민 층에서는 아편을 사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돈을 챙기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고 전해진다.
제2차 보어전쟁
대영제국의 만행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케이프에서도 일어났다. 영국과 영국령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남아프리카에 있던 트란스발 공화국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 초반 영국인들은 고전했는데, 보어인들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전투 방식은 본국과 10,000Km 이상 떨어진 영국군에게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다.
특히 스피온 콥 전투에서 대패를 하면서 영국은 이전에 보어인들에게 진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화가 단단히 난 영국은 여기서 또 한번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보어인들의 생활 터전을 없애기 위해 강제 수용소를 설치해 강제로 보어인들은 수용소로 집어 넣었다.
대영제국은 보어인들과 관련없는 남아프리카 흑인들도 보어인들의 편을 든다는 이유로 강제로 수용시키며 무려 12만명이 넘는 사람들은 잡아들였다. 이 강제 수용으로 약 3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아사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삶의 터전을 잃은 보어인들을 상대로 영국은 초토화 작전을 펼치게 되고 추악한 승리를 따낸다.
이 사건은 훗날 히틀러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강하게 비난했던 영국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